알파와 오메가이며 처음과 마지막이신 창조주께서(계 1:11) 처음에 비블로스 게네시스, 즉 게네시스로 시작하는 비블로스라고 정확한 책이름을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어 유앙겔리온과 영어 가스펠을 정확히 번역하면 희소식입니다. 인간의 희소식 본능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비블로스 희소식뿐이며, 복음이란 오역은 오히려 기복신앙을 낳았습니다.
사람이 어떤 대상에 대하여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행위를 일반적으로 믿음이라 합니다. 믿쁨은 아주 특별한 믿음입니다. 비블로스 말씀을 듣고 새롭게 태어난 생명으로 믿는 것을 믿쁨이라 합니다. 새 생명의 본성인 미쁨에 기초한 믿음이기에 믿쁨인 것입니다.
비블로스 말씀을 듣고 새롭게 태어나 착한 엘성(양심)이 응답하는 것을 확인하고서 주는 것이 밥티스마입니다. 지상명령 제1호인 만큼 번역이 아닌 정확한 음역을 하여야 말씀 그대로 성취됩니다. 세례나 침례는 번역인데다가 례(禮)를 첨가한 행위의 법이므로 믿쁨의 법인 밥티스마와는 전혀 다르며, 오히려 걸림돌이 됩니다. 정확히 순종하라는 것을 대충 시늉만 내다가 무효로 만드는 청개구리 신앙입니다.
일상 속의 평범한 저녁식사처럼, 주님의 저녁식사도 그렇게 평범하게 자주 행하여 기억하라는 것인데도, 오히려 성만찬으로 거룩하게 한다며 연례행사로 바꾸는 것은 청개구리 신앙입니다. 비블로스 낭독을 위해 모일 때마다 하는 것이 좋으며, 저녁식사 하듯 매일하면 더욱 좋습니다.
원래 이름이란 처음 지어줄 때의 언어로 발음하고, 다른 언어로는 음역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창조주의 이름도 처음 이름을 주실 때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엘 혹은 엘로힘이라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이스라엘이란 민족이름 속에 엘이라 새겨 넣어 확실히 증거해 주셨습니다. 민족마다 자기 언어로 음역해야 할 것을 번역을 하면서 데오스, God, 神, 하나님 등이 되었지만, 원래의 이름을 음역하여 엘 혹은 엘로힘이라 해야 정확합니다.
정확히 밥티스마를 받은 밥티스마 성도가 진정한 성직자입니다. 신학을 마치고 수임식을 거치면 성직자로 인정해 주고, 성직자와 평신도를 나누어 계급화하는 성직계급제도는 비블로스를 반대하는 잘못된 제도로서 폐기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진정한 밥티스마 성도가 성직자 역할을 하게 해야 마땅합니다.
숨 속에는 혼이 들어있고, 비블로스기록은 혼의 역할이 결정적입니다. 아무 혼이나 해당되지 않고 오직 밥티스마 성도의 혼입니다. 밥티스마 성도의 혼이 비블로스를 기록하고 번역할 때에야 비로소 진리의 영께서 모든 진리로 인도하셔서 말씀의 내용을 온전히 보존해 주십니다.
실제로 티모데오스 둘째서신 3:16의 프뉴스토스(프네오)는 숨주입이 맞고, 영감은 오역입니다. 그리스어 프네오(pneo)의 히브리어는 네샤마(neshamah)인데, 인간창조의 숨주입(네샤마)의 주체가 산 혼(living soul)이듯이, 비블로스기록의 주체도 밥티스마 성도의 산 혼입니다.
영감론의 함정은 위선자들의 저주입니다. 원본영감설을 기반으로 사본, 역본, 번역본은 학자들 소관으로 돌린 다음, 비평학자들의 손을 거친 비블로스를 믿게 만든 것인데, 이들 비평학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주님께서 위선자들로 저주하신 대상입니다(맛 23:13).
그리스어 에클레시아는 왕궁에서 모이는 평민대표회의로서 바실리카라고도 했고, 그 뜻은 왕가(王家, royal family)입니다. 이것을 영어로 쳐치(church)라고 번역했는데, 처음엔 주님의 가정(the house of the Lord)을 의미했으나, house를 건물개념으로 오해하면서 결국 건물과 조직 개념의 church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한국에서는 이것을 교역자(목사)의 설교 듣는 모임이라 해서 교회(敎會)로 번역하였고, 실제로 밥티스마 성도들의 왕가가 성직계급의 설교집회로 대체되었습니다.
이제라도 에클레시아의 본질인 바실리카, 즉 왕가(王家) 개념으로 복원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백성 중에서 뽑힌 밥티스마 성도들이 왕들이 되고 왕의 가족 구성원이 되어, 왕 중의 왕이신 주님과 함께 다스리는 것이 비블로스가 의미하는 에클레시아의 정확한 개념인 것입니다.
비블로스에 첫 언급된 히브리어 나(na)를 영어로 pray라고 번역했는데, 그 뜻은 “부탁하다, 간청하다”입니다. 간청의 대상이 사람에서 창조주로 바뀌면서 간청하다가 기도하다로 잘못 번역되었습니다.
두 눈 감고 두 손 모아 비비는 주술행위에서 비롯된 기도의 자세는 비블로스와는 다르고 이질적입니다. 비블로스는 오히려 평범한 일상의 대화 중에 간절한 필요가 있을 때 자연스럽게 간청하는 모습이고, 그것도 양 팔을 하늘을 향해 벌리거나 두 눈을 뜨고서 간청하는 모습이 대부분입니다.
자꾸 종교적 의례나 의식을 만들지 말고, 그냥 사람과 사람이 대화하듯이 대화하고, 필요하면 간절한 심정으로 간청하면 되는 것입니다. 가령 식사기도 같은 어색한 종교행위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편하게 식사하는 것이 오히려 비블로스와 일치합니다.
이제부터는 기도 대신에 간청을 하고, 기도자세 대신에 자연스럽게 눈 뜨고 대화하는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인류를 동방과 서방으로 나누는 것은 지정학적 기준만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로마제국을 기준으로 동방과 서방으로 나누기도 하고, 그리스를 기준으로 아시아와 유럽으로 나누기도 하지만, 비블로스는 보다 근본적인 기준을 보여줍니다.
동방을 동양, 오리엔트, 아시아 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해 뜨는 곳을 의미하고, 서방을 서양, 옥시덴트, 유럽 등으로 부르는데 해가 지는 곳을 뜻합니다. 인류는 본능적으로 해 뜨는 곳을 동경합니다.
비블로스는 동방과 서방을 나누는 기준을 바벨탑 사건을 통해 계시합니다. 대홍수 직후 해 뜨는 동쪽으로 향하던 인류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서쪽으로 가서 쉬나르 평야에 거주하며(겐 11:2) 거기에서 바벨탑 건설에 동참하였습니다(겐 11:3,4). 그 때부터 그들이 서방 민족연합이 되어 서방이라는 개념이 생겼습니다. 반면에 유일하게 욕탄 민족만이 그들과 타협치 않고 계속 동쪽으로 가서 최초의 동방민족이 되었습니다(겐 10:25-30).
인류가 동방, 서방 개념을 갖게 된 효시가 바벨탑 사건인데, 바벨탑 사건의 확실한 증거가 언어혼잡(language confounding)으로서, 민족들 간에 말이 통하지 않아 소통이 어렵게 된 현상입니다. 이런 언어혼잡은 다른 피조물에게는 없고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기적적인 현상으로서 바벨탑 사건의 실재를 뒷받침해 줍니다.
해가 지면 새롭게 해가 뜨듯이, 서방의 시간이 다하면 결국 동방의 시간이 올 것입니다. 비블로스를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대부분 서방을 위한 기회들, 서방시간들로 점철되다가, 이따금 동방의 요브(JOB, 욥)나 동방 현자들(예수스 탄생 시점)의 언급 정도로 그치다가, 끝에 가서는 마침내 동방 아시아의 일곱 왕가들이 등장하면서, 비블로스의 최종결론이 동방 아시아에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자유의지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모든 것의 열쇠입니다.
자유의지란 스스로 선택하고 심판하여 결정짓는 의지로서, 원래 창조주 고유의 의지인데, 피조물 중 특별히 인간에게만 이 자유의지를 부여하셨습니다.
땅바닥의 흙먼지로 빚은 연약한 아담에게 이 자유의지를 주셔서 산 혼이 되게 하시고, 남자인 아담에게서 여자를 만들어 혼의 생명을 낳는 자 에바(하와)가 되게 하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이 창조주의 아내가 되고 거룩한 엘로힘 가족을 이루려는 것이며, 창조주와 인간이 하나 되어 함께 하늘과 땅을 통치하고자 계획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창조주의 자유의지를 바르게 사용하려면 반드시 시험과정과 성숙과정을 거쳐야 하며, 그래서 시간이 필요했고 기나긴 인류역사가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시간 안에서 인간의 범죄, 타락, 실패는 영원 안에서 대반전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최악은 최선을 위한 필요악입니다.
비블로스 신뢰는 영생이지만, 불신의 죄 때문에 죽음이 왔고, 인간수명이 정해졌습니다. 처음엔 900살 넘는 수명이었다가 대홍수 이후로 수명이 대폭 줄었습니다.
물리적 환경변화로 수명이 단축된 것도 있지만, 인류역사의 연장과, 인류의 충분한 수가 채워지기까지 시간을 쪼개어 기회를 배분하는 배려도 있습니다. 만일 대홍수 심판과 수명단축이 없었다면 인류는 조기에 멸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현 인류가 기후변화와 환경변화로 몸살을 앓고 있지만, 의외의 결과로 900살 넘게 사는 새로운 환경이 조성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합니다. 조만간 비블로스가 예언한 재림과 천년왕국이 도래하면, 900살 넘게 사는 천년장수세상이 성취될 것입니다. 백세에 죽으면 어린아이고, 저주받은 경우라 할 정도로 말입니다(사 65:20).
정의로운 사람들에게는 평화의 엘로힘이시지만, 범죄자들에게는 심판의 엘로힘이십니다.
창조주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결혼법을 통해 인간과 하나가 되고 한 엘로힘 가족을 이루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을 암수로 창조하셔서 결혼법을 교육시키셨고, 특히 인간에겐 성의 즐거움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지만 성의 즐거움을 남용하고 오용하여 결혼법을 파괴하고 창조의 기본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에 대해서는 엄벌에 처하셨고,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부부가 되어 가족을 이루라고 성을 선물로 주신 것인데도, 인간이 타락하여 부부가 아닌데도 성관계를 가지면서 가정이 파괴되고 수많은 문제들이 터져 나왔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소돔과 고모라 도시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동성 간에 성관계를 가졌고, 인간이 아닌 동물과도 성관계를 가졌으며, 심지어 천사들과 성관계를 시도하다가 갑작스런 멸망을 당한 경우였습니다.
부부 외의 남녀 성관계도 간통죄, 음란죄로 엄히 처벌하는 것은 가족의 질서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남녀관계를 넘어서면서부터는 타락이 급속도로 진행됩니다. 동성애 성관계부터는 걷잡을 수 없이 타락하여 이내 짐승과의 성관계인 수간으로 발전하고, 최후에는 육화한 천사들과의 성관계에까지 이르는데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소돔과 고모라였던 것입니다.
창조주의 인내의 한계가 거기까지입니다. 육화한 천사들과의 성관계로 거인들이 태어나게 되면, 즉각적인 멸망의 심판이 내려집니다. 대홍수 심판도 그 때문이었고, 소돔과 고모라 사건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전 세계가 이미 동성애 선을 넘어 수간에까지 이르렀고, 조만간 한계선에 도달할 조짐을 보이고 있으며, 비블로스에서는 불의 심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귀신은 존재합니다. 다만 그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있을 따름입니다. 비블로스에서는 그 정체를 마귀라고 알려주며, 사탄 마귀를 왕으로 섬기는 마귀들의 왕국에 속해 있습니다.
흔히들 죽은 사람의 혼이 귀신이 된 것으로 오해하는데, 그들의 정체를 숨기고 혼란을 주기 위한 사탄의 왕국의 치밀한 전략입니다. 영어 현대역본들이 demon이라 오역한 것을 한글 개역성경에서 귀신으로 옮기면서 오해와 혼란이 야기되었습니다.
이것을 바로잡은 것은 영어 제임스왕역본(KJV) 비블로스였습니다. 그리스어 낱말들은 성구분이 있어서 사람의 혼이 귀신이 된 것이라면 성이 일치해야 합니다. 사람의 혼은 프쉬케(psuche)로서 여성명사입니다. 귀신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다이모니온(daimonion)은 중성명사로서 성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서로 존재 자체가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그리스어 디아볼로스(diabolos)는 비방하는 자(traducer)란 뜻이고, 다이모니온은 운수 분배자(fortune distributer)란 뜻입니다. 둘 다 성도 중성으로 같고 역할도 같으며, 둘 다 악한 영들(evil spirits)로 묘사되는 바, 영들의 그리스어 프뉴마(pneuma) 역시 중성입니다. 즉 디아볼로스나 다이모니온이나 같은 정체성의 다른 묘사일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비블로스 용례를 자세히 살펴보면 같은 정체성인 사실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다만 헬라사상에서 다이모니온은 인간과 신의 중간자로 묘사되기에, 귀신이라는 무속개념과 일치하고, 죽은 사람의 혼백이라는 사상으로 발전한 것이었습니다. 사탄 마귀의 왕국에서 무속적인 헬라사상을 전략적으로 이용하여 인간의 혼과 마귀를 뒤섞어서 혼동케 만든 것이었습니다.
사탄의 왕국도 치밀한 정보전과 고도의 전략을 구사하기에, 기적들과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총동원하여 졸개 마귀들을 죽은 사람의 혼백인 것처럼 속이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오직 비블로스 진리만이 그들의 정체를 백일하에 드러내고, 그들의 기만전략을 무효화시킬 수 있습니다.
인간이성이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의 지식을 인류는 과학이라 부릅니다. 진리에 도달한 것이 아닌 이상 과학은 진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가설과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비블로스 진리를 입증할 따름입니다.
대륙이동설과 판구조론이라는 과학적 지식만 해도 그렇습니다. 비블로스에 기록된 아주 소소한 지식 하나를 입증하는 데 수천 년의 과정지식이 소요된 셈입니다.
비블로스는 단지 펠레그의 날들에 땅이 나뉘었다는 한 마디를 기록했을 뿐입니다(겐 10:25). 그 얘기는 당시에 대륙이 하나였다가 갑자기 여러 대륙으로 나뉘었다는 것인데, 단순한 한 마디 언급 같지만 그 배경에는 그럴만한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벨탑 사건으로서, 당시 인류가 동방으로 가던 길을 돌이켜 서방으로 가서 바벨탑을 세웠고, 펠레그의 동생 욕탄만 계속 동방으로 갔습니다. 서방 민족연합의 바벨탑 건설이 언어혼잡으로 중단되자, 서방연합세력은 흩어졌고, 일부는 자신들을 배신한 욕탄을 뒤쫓아 동방으로 갔습니다. 바로 그 때에 대륙이동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욕탄 민족을 위한 특별 보호조치였다 할 수 있습니다. 갑자가 대륙이 융기하고 갈라지면서, 뒤쫓아 가던 서방세력의 침공을 크게 지연시켰던 것입니다. 대륙융기로 솟아오른 에베레스트 산, 파미르 고원, 천산산맥 등이 지연시켰고, 동쪽 끝까지 간 욕탄자손(극동아시아인)은 오늘날의 아메리카 대륙(극동아시아대륙)으로 갈라져나가 수천 년 간 서방세력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인류의 과정지식인 과학은 수천 년 동안 대륙이동설을 철저히 부정해오다가, 20세기에 들어서고 나서야 비로소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독일의 대기과학자 알프레드 베게너(Alfred Wegener, 1880-1930)는 1912년 <대륙의 기원>이라는 저서를 통해 대륙이동설을 처음 알렸고, 1915년에 낸 <대륙과 해양의 기원>에서 그는 과거에 존재했던 판게아(Pangaea)라는 초대륙이 분열되어 현재의 대륙을 형성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지질학자들이 그토록 공격했던 “어떻게 대륙이 움직인단 말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판구조론(Plate Tectonics)이었습니다. 대륙이동설(1912년)이 맨틀 대류설(1929년)과 해저 확장설(1962년)을 거쳐 판구조론(1960년대 후반)으로 정립된 것입니다. 지각이 맨틀 위에 떠서 움직인다는 판구조론은 실로 지질학의 혁명이었으며, 1960년대 후반에는 모든 학자들이 이 학설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지진뉴스가 나올 때마다 판구조론이 언급되는데, 10개의 주요 판으로는 아프리카판, 남극판, 오스트렐리아판, 유라시아판, 북아메리카판, 남아메리카판, 태평양판, 코코스판, 나즈카판, 인도판 등이 있습니다.
판구조론이 진리에 도달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과정지식일 뿐이며, 앞으로 또 하나의 소소한 비블로스 지식을 입증하면서 과학의 또 다른 혁명이라 말할지도 모릅니다.
인류는 영원과거와 영원미래 사이 시간의 다리를 건너고 있습니다. 시간의 다리를 다 건너면 인류역사는 끝날 것입니다. 인류역사의 끝은 시간의 끝이고, 시간의 끝은 영원미래입니다.
영원과거의 숙제가 시험의 시간과 성숙의 시간을 거쳐 완전한 영원미래로 완성됩니다. 그것이 시간의 존재이유와 목적입니다.
마지막 재앙이든 새로운 희망이든 시간의 과정일 뿐 끝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류역사의 끝은 완전하게 완성된 영원미래입니다. 인류역사는 늘 불완전하고 미완성된 모습이었으나, 인류역사의 끝에는 완전하고 완성된 모습이 어떤 것인지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기대해도 좋습니다.
영어 와인(wine)은 라틴어로 비눔(vinum)이라 하고, 이탈리아어로는 비노, 독일어로는 바인, 프랑스어로는 뱅이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와인으로 음역하기도 하고, 포도주라고도 하는데, 포도라는 말은 중국에서 왔고 중국의 포도는 중앙아시아의 부토에서 왔습니다. 원래 포도의 순수 우리말은 머루입니다.
우리가 아는 와인지식의 대부분은 서방 와인지식입니다. 와인의 기원과 원조에 대한 서방신화들에서 시작하여 온갖 서방와인 지식들과 상식들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인류를 세뇌시키는 마케팅에 성공해왔고, 실제로 마시는 와인의 대부분이 서방와인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서방와인이 진리는 아닙니다. 와인의 진실은 따로 있습니다.
서방이 만들어낸 대표적인 와인신화는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신화와 로마의 바쿠스 신화인데 이 둘은 사실상 하나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하고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꾸며냈지만, 어디까지나 신화일 뿐 진실은 아닙니다.
진리의 책 비블로스는 대홍수 직후 노아흐(Noah, 노아)가 인류최초로 포도원을 심었고, 와인을 양조하여 마시고는 취했다고 기록합니다(겐 9:20). 노아흐 이후 두 번째 기록에서는(겐 14:18) 살렘 왕 멜키쩨덱이 빵과 와인을 가지고 나왔는데, 그는 지극히 높으신 엘의 성직자였다고 했습니다.
와인의 기원과 원조는 대홍수(BC 3000년경) 직후 노아흐가 아라라트(Ararat) 산들 근방에서 시작한 와이너리였고, 인류 최초의 발효식품은 빵과 와인인데, 비블로스상의 주식으로서, 예수스 크리스토스의 몸을 기억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고고학적 증거들이 뒷받침하듯이, 인류 최초의 와인생산지는 아라라트 근방인 코카서스 3개국(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과 튀르키예 등지이며, 이 지역들은 서방이 아닌 동방입니다. 그러니까 와인의 기원과 원조는 서방이 아니라 동방이라는 사실입니다!
동방 의인으로 잘 알려진 요브(Job, 욥)도 가족들과 와인을 마셨다고 기록되어 있듯이(욥 1:13,18), 일찍부터 동방 와인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와인 양조장을 와이너리(winery)라 부르고, 맥주 양조장은 브루어리(brewery), 증류주라면 디스틸러리(distillery)라 부릅니다.
서방 와이너리들은 대농들(farmers)에다가 기업형태의 대규모인 경우가 많지만, 최초의 와이너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노아흐는 대농(farmer)이 아닌 가정농부(husbandry)였고, 노아흐의 와이너리는 가족단위의 소규모 와이너리였으며, 그것이 동방 와이너리의 특징이기도 하였습니다. 소규모 가내 와이너리일수록 수제와인으로서 화학약품이 필요치 않고, 천연발효라서 건강에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서방와인의 비티스 비니훼라(Vitis vinifera)종은 고도의 육종개발을 통해 고품질을 자랑하지만 병충해에 약한 반면, 동방와인의 비티스 아무렌시스(Vitis amurensis)종은 대부분 자연에 방치된 야생이지만 병충해에는 강합니다. 유럽종과 아시아종의 교잡이라 할 수 있는 북미의 비티스 라브루스카(Vitis labrusca)종은 나름 아시아종의 품질도 향상시켰고 병충해에도 강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캠벨 얼리(Campbell early)는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Campbell씨가 Moore Early에 머스캣 햄버그(Muscat Hamburg)를 교배 육성한 품종으로 1892년에 선발 명명하였고, 우리나라에 1908년에 도입되었습니다. 한국 토양과 기후에 적합하여, 정작 미국에서는 단종되었는데, 한국땅에 자리잡아 토종이 되다시피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포도의 약 80%가 캠벨 얼리일 정도입니다.
자선을 행할 때 공개적으로 알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심지어 나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공개적인 보상을 기대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심지어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렇게 자선을 행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문제는 사람들이 시간의 상대성 원리를 알지 못하기에, 현 세상에서 보상받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공개적인 보상이 의미하는 것은 현 세상에서의 보상이 아닙니다. 현 세상에서는 끝까지 비밀로 해야 오는 세상에서 공개적으로 보상받게 됩니다. 현 세상에서 얻으면 오는 세상에서 잃고, 현 세상에서 잃으면 오는 세상에서 얻게 되는 것이 시간의 상대성 원리입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서는, 오른손이 행하는 것을 왼손이 알지 못하게 할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비블로스에서 빵과 와인이 주식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루 세 끼, 매일 먹는 것이 주식인 만큼, 일 년이면 천 번도 넘게 먹는 셈입니다. 당연히 매일 먹는 주식 안에는 자주 기억해야 할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빵에 담긴 메시지는 한 알의 밀로부터 시작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하였습니다. 또한 밀은 가루가 되어 자기 형체를 잃으면 다양한 형체로 부활합니다.
와인은 포도들의 피라 했고(겐 49:11), 피는 모든 육체의 생명이라 했습니다(렙 17:14). 죄들의 사면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린 주님의 피는 새 유언의 피라 말씀했습니다(맛 26:28).
빵과 와인은 주님의 살과 피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그것은 곧 영원한 생명의 메시지입니다.
비블로스에서 빵과 와인이 주식인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류 전체가 빵과 와인을 주식으로 하는 날들이 올 것이며, 쌀 문화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이 빵에 담긴 메시지를 그토록 자주 기억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시대부터 쌀을 주식으로 해왔지만, 이미 밀가루가 주식으로 바뀌는 추세에 있습니다. 쌀 문화 때문에 심지어 주님의 저녁식사(만찬)의 밀가루 빵조차 개역한글성경이 쌀로 만든 떡으로 바꿔버렸는데, 빵의 메시지를 떡에 담는 것 자체가 모순이며, 주식이 아닌 간식으로 그토록 자주 기억하는 것 역시 불가능합니다.
진정 비블로스 진리대로 살고자 하면, 비블로스로 돌아와야 하고, 어차피 언젠가는 빵과 와인이 주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창조주의 모든 이름들은 다 고유명사입니다. 유일무이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창조주 이름을 보통명사로 부르게 되면, 많은 창조주들 중의 하나라는 의미가 되어 다신론, 범신론의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창조주를 유일무이하신 분으로 믿는다면, 창조주의 모든 이름은 당연히 고유명사여야 하고, 고유명사는 그 이름이 처음 주어질 때의 언어로 표기해야 마땅하며, 다른 언어로 그 이름을 부를 때는 당연히 음역을 하여 정확히 그대로 부르는 것이 원칙입니다.
창조주 이름이 처음 주어질 때의 언어는 히브리어였고, 히브리어 비블로스에 기록된 창조주의 이름은 ‘엘로힘’(Elohim)이었습니다(겐 1:1). 원래는 ‘엘’(El)인데 그분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가족(family)개념이자 집합체(assembly)인 엘로힘으로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셨습니다.
스스로 아버지 엘로힘과 아들 엘로힘과 거룩하신 숨 엘로힘으로 확장되신 다음, 새 창조된 인간들을 엘의 아들들로 영입함으로써, 영원한 엘로힘 가족을 성취하는 것이 엘의 영원한 창조계획입니다.
창조주 이름 엘을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 속에 새겨 넣어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그 이름을 알게 하셨고, 비블로스에는 그 이름을 엘로힘이라 기록함으로써 그분의 이름 속에 담긴 창조계획을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문제는 창조주를 배신하여 타락한 후 멀리 떠난 인류가 창조주의 이름을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기나긴 망각의 시간들이 지났고, 이제는 그분께로 돌아와 그분의 이름을 정확히 부를 때가 되었습니다.
민족마다 자기 언어로 더듬어 찾은 창조주의 이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데오스라 불렀고, 로마인들은 데우스라 불렀으며, 이슬람 국가들은 알라라고 불렀습니다. 잉글랜드 민족은 갓(God)이라 불렀고, 중국인들은 신(神, shen)이라 불렀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하늘님이라 하여 하느님으로 부르기도 하고, 유일성을 강조하여 하나님이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나마 영어 갓의 대문자 표기나 한글의 하나님은 범신론이나 다신론을 탈피하여 유일성을 살린 이름이라 할 수 있지만,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라는 한계가 있고, 음역이 아닌 번역이거나 혹은 자의적 작명이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무지의 시대에는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간에 창조주께서 눈감아 주셨는데, 그것은 혹시라도 더듬어 찾다가 발견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활 17:27,30).
이제는 원래의 제자리로 돌아와 창조주의 이름을 정확히 불러야 할 성취의 시간이 왔습니다. 특히 우리 한민족의 경우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어 온 하느님, 하나님 논쟁이, 오히려 창조주의 정확한 이름을 알고 부를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저자이신 창조주께서 친히 비블로스 게네시스(맛 1:1), 즉 게네시스로 시작하는 비블로스라고 말씀해 주셨기에, 그 말씀 그대로 순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거룩한 책이란 뜻인데, 그만큼 죄인이 접근하기가 어렵고 거리감이 있는 책이 됩니다. 영어 바이블은 비블로스를 음역해야 할 것을 잘못 비블론(일반 책)의 복수형 비블리아를 음역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제목만 바이블이고 본문에서는 다 책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비블로스는 숨 쉬는 진리의 책으로서, 호흡이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책이고, 단지 소리 내어 읽기만 하면 누구나 비블로스와 함께 숨 쉬게 되는 그런 책입니다. 뿐만 아니라 진리의 책인 만큼 모든 문제에 대한 확실한 답을 얻을 수 있고, 정확한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있습니다. 제목부터 정확하고 본문에서도 책이 아닌 비블로스라고 해야, 정확한 성취의 책 비블로스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성경이나 성서라 부르지 말고, 바이블이라 하지도 말며, 정확한 이름인 비블로스라고 불러야 하겠습니다.
시간의 최종목표가 그것입니다. 착한 사람이 무시당하고,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냉혹한 현실은 시간의 과정일 뿐입니다. 인류에게 주어진 인생의 시간들은 시험의 시간, 성숙의 시간들이지만, 인간이 이해를 못해서 문제가 됩니다.
우선 착하다는 개념부터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착한 사람을 순진하고 이타적이어서 호구가 되기 쉬운 사람 정도로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비블로스에 의하면 비블로스에 기록된 엘로힘의 말씀 그대로 성취되는 것이 착한 것이며(겐 1:3-31), 따라서 말씀성취의 권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착한 사람인 것입니다. 착하다에서 착착이란 의태어가 나왔듯이, 일을 착착 진행하여 성공시키는 당당한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 해야 마땅합니다.
물론 말씀성취의 능력은 정직과 정의를 기초로 하므로, 부당한 방식으로 성취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불의 앞에서 소극적이거나 비굴한 사람도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비블로스 진리에 따라서 착하다는 개념을 정확히 재정립해야 합니다.
인간 세상의 희망은 착한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입니다. 세상이 죽음을 이기지 못하듯, 죽음은 시간을 이기지 못하며, 시간은 끝까지 기다리는 인간을 이기지 못합니다.
눈앞의 현실만 보고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실 세상의 부당한 힘들을 보고 두려워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다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며, 결론을 내리기엔 아직 이릅니다.
착한 사람이 힘을 가지려면 비블로스를 알아야 합니다. 비블로스가 정확해야 거기에서 정상적인 성취권능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정확한 비블로스를 알고, 비블로스를 낭독하며(계 1:3), 그것을 들은 자들 안에서 믿쁨과 화합하기만 하면(히 4:2), 하늘에서와 땅에서 모든 권능이 그 착한 사람과 함께 있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맛 28:1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