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어해설은 비블로스용례 중심이며, 그것은 진리의 용례입니다. 정확한 비블로스는 정확한 낱말이 생명입니다.
일단 비블로스 각 책 명칭부터 정확히 번역하여 소개합니다. 그리고 비블로스 용어들 중에서 우선 32낱말들에 대하여 어원과 단어해설 등을 통해 왜 그렇게 번역되어야 하는지 바른 이해를 돕고자 하였습니다.
게네시스라 부르는 모세스의 첫째 비블로스
탈출이라 부르는 모세스의 둘째 비블로스
레비성직체계라 부르는 모세스의 셋째 비블로스
숫자문제라 부르는 모세스의 넷째 비블로스
다시주신법이라 부르는 모세스의 다섯째 비블로스
요슈아의 비블로스
심판자들의 비블로스
루쓰의 비블로스
사무엘의 첫째 비블로스, 달리 칭하면, 왕들의 첫째 비블로스
사무엘의 둘째 비블로스, 달리 칭하면, 왕들의 둘째 비블로스
왕들의 첫째 비블로스, 흔히 부르기를, 왕들의 셋째 비블로스
왕들의 둘째 비블로스, 흔히 부르기를, 왕들의 넷째 비블로스
연대기들의 첫째 비블로스
연대기들의 둘째 비블로스
에쯔라
네헤미아의 비블로스
에스테르의 비블로스
요브의 비블로스
시들의 비블로스
금언들
회중 교훈서; 혹은, 선포자
솔로몬의 노래
대언자 이사이아의 비블로스
대언자 예레미아의 비블로스
예레미아의 애가들
대언자 에제키엘의 비블로스
다니엘의 비블로스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디아
요나흐
미카흐
나훔
하박쿡
쩨파니아
학가이
쩨카리아
말라키
성도 맛싸이오스에 따른 희소식
성도 마르코스에 따른 희소식
성도 루카스에 따른 희소식
성도 요안네스에 따른 희소식
사도들의 활동들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사도 파울로스의 서신
코린도스인들에게 보내는 사도 파울로스의 첫째 서신
코린도스인들에게 보내는 사도 파울로스의 둘째 서신
갈라티아인들에게 보내는 사도 파울로스의 서신
에페수스인들에게 보내는 사도 파울로스의 서신
필립포스인들에게 보내는 사도 파울로스의 서신
콜롯세인들에게 보내는 사도 파울로스의 서신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내는 사도 파울로스의 첫째 서신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내는 사도 파울로스의 둘째 서신
티모데오스에게 보내는 사도 파울로스의 첫째 서신
티모데오스에게 보내는 사도 파울로스의 둘째 서신
티토스에게 보내는 파울로스의 서신
필레몬에게 보내는 파울로스의 서신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사도 파울로스의 서신
야코보스의 일반서신
페트로스의 첫째 일반서신
페트로스의 둘째 일반서신
요안네스의 첫째 일반서신
요안네스의 둘째 서신
요안네스의 셋째 서신
유드의 일반서신
예언자 성도 요안네스가 전한 계시
[활용]
apostles, apostleship
[의미]
n. 사도(使徒), 아포스톨로스
apostleship: 사도직분(활 1:25; 롬 1:5; 코첫 9:2; 갈 2:8), 아포스톨로스의 직분
[어원]
< Gk apostolos < L missio < mitto, to send: 영어의 missionary는 라틴어의 음역으로서 ‘사도’를 뜻하며, 선교사란 번역은 명백한 오역이다.
[사용횟수]
맛 10:2부터 계 21:14까지 80구절, 83회 사용됨. OT에는 없고, NT에서만 사용됨.
[단어해설]
이 단어에 대한 오해 때문에 교황제도와 신부제도, 그리고 목사제도가 생겨났다.
비블로스의 기초를 놓기 위해 부르심 받은 임시직이 사도로서, 비블로스의 완성과 함께 그들의 임무도 끝난 것이었다. 사도권 계승사상은 이 사실을 오해하여 생겨난 이단사상이다.
사도에 해당되는 그리스어(헬라어) 아포스톨로스(apostolos)는 [apo, from + stello, to send]로 구성되어 희소식인 비블로스를 위해 특별히 ‘위임받은 자’(a delegate), ‘파송 받은 자’(one sent forth) 등을 뜻한다.
그리스어 아포스톨로스를 영어에서는 음역과 번역으로 구분해 주었는데, 일반적인 전령을 의미하는 경우는 메신저(messenger)로 번역하였고, 특별히 비블로스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 부르심 받은 자들을 가리키는 경우에는 음역하여 어포슬(apostle)이라 하였다.
한글로 번역할 때에도 원래는 전령과 아포스톨로스로 구분해 주어야 하지만, 굳이 전령과 사도로 구분해 준 것은 음역이 너무 많으면 의미파악이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구분을 위한 경우라면 둘 다 번역으로 처리해도 무방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경우엔 음역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 옳고 바람직하다.
히 3:1은 우리 주 예수스 님을 엘*의 사도라 하였고, 뤀 6:13; 9:10은 예수스 님의 열 두 제자가 곧 사도임을 보여주며, 활 1:22은 사도의 자격을 제시하며, 코첫 9:1; 15:8은 파울로스의 사도 자격에 대해 언급하고, 활 14:4,14은 바르나바스도 사도임을 보여주며, 살첫 2:6은 파울로스와 실바누스와 티모데우스를 사도로 언급하고 있다. 한편 코둘 11:13은 거짓 사도가 있음을 말하며, 계 2:2은 자칭 사도라 말하나 사도가 아니요 오히려 거짓말쟁이로 드러난 자들을 언급한다.
비블로스에서 사도(아포스톨로스)란 단어는 이스라엘 회중에게는 쓰이지 않고 새유언의 왕가(교회)에게만 관련된 매우 독특한 단어이다. 더욱이 사도란 명칭이 최초의 이방인 왕가(교회)인 안티오키아 왕가(교회)에서는 전혀 사용되거나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도들의 활동들에서 사도란 단어의 용례는 이코니움과 리스트라에서 각각 한 번씩(그것도 유다인과 관련하여) 언급된 것 외에는 언제나 예루살렘 왕가(교회)의 범위를 넘지 않고 있다.
서신서들에서 언급된 사도란 단어는 사도권의 확인과 사도권 시비에 대한 변증에서만 사용되고 있고, 이방인 왕가(교회) 자체에서 사도직이나 사도적 은사가 있었다는 근거는 적어도 권위역 바이블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거짓 사도나 자칭 사도라 하나 아닌 사례만 언급되었을 따름이다(코둘 11:13, 계 2:2).
권위역 바이블은 ‘사도’(apostle)와 전령(messenger, 사자)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코둘 8:23의 경우도, 권위역 제임스 왕 바이블은 그리스어 아포스톨로스(apostolos)를 ‘전령’(messenger)으로 번역하였고, 마찬가지로, 필 2:25의 경우에도, 에파프로디투스(Epaphroditus)를 사도(apostle)가 아닌 ‘너희의 전령’(your messenger)이라고 번역하였다.
참고로 권위역 바이블에는 ‘전령’(messenger)이란 단어가 총 112회 사용된 중에 OT에서만 무려 103회 사용되었고, NT에서는 단지 9회만 사용되었는데, 그것도 희소식의 책들에서는 주로 밥티스마 요안네스(요한)에게만 사용되었다.
비블로스에서 사도란 단어가 가장 많이 사용된 곳은 다름 아닌 코린도스인들첫째 서신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사도 문제가 가장 많이 거론된 코린도스 왕가(교회)가 가장 문제 많은 왕가(교회)로 특징지워진다는 사실이다.
엪 2:20은 희소식을 위해 부르심 받은 사도들과 대언자들이 엘로힘*의 성전 건물의 기초(foundation) 부분임을 밝혀준다. 이미 닦여진 기초 위에 또 다른 기초를 세울 수는 없다고 말씀한다.
따라서 사도들과 대언자들의 임무와 역할은 어디까지나 희소식인 비블로스의 기초를 닦는 데 국한됨을 알 수 있다.
[단어비교]
apostle: 사도, 아포스톨로스; messenger: 전령
[활용]
baptized, baptizest, baptizeth, baptizing, baptism, baptisms, baptist
[의미]
밥티스마를 주다(맛 3:11; 맠 1:4,8; 뤀 3:16; 요 1:26,33; 코첫 1:17)
baptism(s): 밥티스마(롬 6:4; 엪 4:5; 콜 2:12; 펱첫 3:21; 히 6:2: 복수형은 히 6:2에서 한 번 쓰임)
baptist John: 밥티스마(인) 요안네스
[어원]
<Gk baptizein < baptein dip in water 물에 담그다
[사용횟수]
맛 3:1부터 펱첫 3:21까지 91구절, 115회 사용됨.
[단어해설]
‘밥티스마’만 제대로 알았어도 인류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 한 단어에 대한 오해 때문에 유아세례(infant baptism)가 생겨났고, 유아세례를 반대한다는 이유 때문에 종교재판과 대학살이 난무한 암흑시대를 초래하였다. 빛과 소금 대신 암흑을 가져온 시행착오는 더 이상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
밥티스마는 부활의 증거다. 부활의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이 선한 양심으로 응답하는 것이 밥티스마이다. 그래서 반드시 물에 잠겼다가 나오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옛사람이 수장되고 새사람이 물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증거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정확한 행위이다.
이것을 형식적인 종교의식으로 취급하여 세례(洗禮)나 침례(浸禮)로 변질시킨 결과 빛 대신 어두움이 왔고, 새생명의 열매 대신 죽은 기독교, 죽은 정통의 열매를 맺게 된 것이었다.
영어 바이블의 뱁티즘(baptism)은 처음 단어인 그리스어 ‘밥티스마’를 음역한 것으로서, 그 의미는 ‘완전히 담그는 것’(immersion), 혹은 ‘잠기게 하는 것’(submersion)을 뜻한다.
비블로스의 실제 용례를 확인해 보아도 예외 없이 “물에 들어가(immerse), 잠긴 후에(submerse), 밖으로 나오는(emerge)”는 형태임을 알 수 있다(맛 3:16의 예수스의 예와 활 8:38,39의 에티오피아 내시의 예에서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이렇듯 밥티스마를 번역하지 않고 음역(transliteration)한 것은 종교의식과 같은 형식이 아니라 생명을 변화시키는 명령의 말씀이기 때문에 독특한 원 의미를 그대로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이토록 중요한 이 단어를 소홀히 취급하여 대충 세례(washing)나 살수례(sprinkling)로 대체한 행위는 이 명령을 주신 창조주를 무시하고 배반하는 행위이다.
혹자는 정결례를 근거로 주장하나 비블로스의 정결례는 밥티스마와 전혀 다른 의식이어서 근거가 될 수 없다. 물로 아무리 씻어도 사람이 죽을 수가 없다. 물에 잠겨 죽어야만 부활의 새 생명이 성취될 수 있다.
살수례나 세례 혹은 유아세례는 이교도의 정결례 의식을 받아들여 밥티스마를 대체해 버린 로마 카톨릭교에 의하여 기독교 전체에 퍼진 것이라는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다. 바빌론 종교의 인신제물, 특히 유아제물의 풍습에서 정결례로서의 세례와 유아세례가 유래하였음은 이미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같은 이교적 의식들이 아무리 비블로스의 밥티스마를 모방한 유사품일지라도, 오히려 정확한 말씀성취를 방해한다는 사실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영어 권위역 바이블이 물에 담근다는 의미 그대로 이멀젼(immersion)이나 서브멀젼(submersion)이란 단어로 번역할 수도 있었는데, 굳이 음역의 원칙에 따라 뱁티즘(baptism)으로 한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엘로힘*께서 왕가(교회)에게 주신 첫 명령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한 것임에 틀림없다.
만일 그 명령을 음역하지 않고 번역하게 되면, 자칫 종교적 의식(ceremony)인 것처럼 오해되어 본 취지가 약화될 수 있고, 각 나라마다 번역이 제각각이 되어 해석이 첨가되거나 변질될 소지도 있다.
따라서 그 명령 그대로 순수하게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처음 명령하실 때의 표기와 발음을 그대로 살리는 음역의 원칙을 채택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영어 바이블에서는 밥티스마를 영어로 뱁티즘(baptism)이라 표기하고, 밥티조를 뱁타이즈(baptize)로, 밥티스테스를 뱁티스트(baptist)로 표기하였다.
권위역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에도 이같은 ‘음역’(音譯) 원칙에 따라서 baptism을 ‘밥티스마’로, baptize를 ‘밥티스마를 주다’로, baptist를 ‘밥티스마인’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동안 우리말 비블로스들은 음역의 원칙을 무시한 채 굳이 세례(洗禮)로 표기해 왔다. 세례(洗禮)라 표기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중국과 우리나라뿐이다(이웃나라 일본도 ‘밥티스마’로 표기하였다.).
그러므로 비블로스 그대로 주님의 지상명령을(맛 28:19) 순수하게 전달하여 온전히 순종케 하기 위해서라도, 명령 그대로 정확히 살려서 ‘밥티스마’로 음역할 필요가 있다.
‘침례’(浸禮)란 표기도 의미상 틀리지 않다고 정당화할 수는 있겠으나, 음역 원칙에 위배될 뿐 아니라, ‘례’(禮) 곧 ‘의식’(儀式, ceremony)이란 해석이 첨가되어 정확하다고 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한글로 ‘밥티스마’라고 음역하게 되면, 영어 ‘뱁티즘’보다 더 정확한 표기가 될 것이다.
이 한 단어만 바로잡아도 한국인의 역사가 달라질 것이며, 진정한 개혁과 삶의 변화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비블로스에 나타나 있는 밥티스마의 종류에는 요안네스(요한)의 밥티스마(맛 3:6,7; 맠 1:9; 뤀 3:3)와; 예수스 님께서 받으신 밥티스마(맛 20:22,23; 맠 10:38,39)가 있고; 믿는 자들이 거룩하신* 숨*님으로 받는 밥티스마(맛 3:11; 요 1:33; 활 1:5; 코첫 12:13)와; 아버지, 아들, 거룩하신* 숨*의 이름으로 받는 밥티스마(맛 28:19); 혹은 주님의 이름으로 받는 밥티스마(활 10:48), 혹은 주 예수스 이름으로 받는 밥티스마(활 8:16)가 있으며; 그리고 불의 심판의 밥티스마(맛 3:11; 뤀 3:16)가 있다. 그러면서도 비블로스는 하나의 밥티스마를 말씀하고 있다(엪 4:5).
또한 비블로스는 밥티스마의 교리를 모든 교리의 근본기초로 말씀하고 있다(히 6:1,2).
[단어비교]
baptize와 immerse
[활용]
charitably
[의미]
새사랑(코첫 8:1, 크리스토스의 사랑, 크리스천의 사랑),
charitably: 새사랑으로(롬 14:15)(according to charity)
[어원]
< F charite < L carus dear. cf. carees, cherish
[사용횟수]
롬 14:15부터 계 2:19까지 25구절, 29회 사용됨.
[단어해설]
권위역에서 코첫 8:1부터 총 26군데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아가페라는 그리스어가 새유언에서 115회 사용된 중에서 이 26회를 제외하고는 모두 “love”로 번역되었다.
그리스어 아카페가 라틴어 카리타스(caritas)를 거쳐 채리티(charity)로 발전하였다.
charis(은혜)가 아닌 carus(높은 가격)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크리스토스의 생명에서 나온 초자연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크리스천의 초자연적인 사랑이 이웃사랑으로 나타나면서 자선행위의 열매들을 많이 맺었기에, 오늘날에는 자선행위를 지칭하는 단어로 많이 사용되고 있긴 하지만, 원래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니다. 아담의 생명 안에서는 발견될 수 없고, 오직 크리스토스의 새생명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사랑이 바로 charity이다.
영어 dilection 역시 영적인 사랑, 혹은 크리스천 사랑을 의미하며, 사람을 향한 엘로힘*의 사랑 혹은 엘로힘*을 향한 사람의 사랑을 의미하는데, 선택의 행위라는 기본의미를 갖고 있고, election과 같은 기본의미를 갖는다.
[단어비교]
mercy, compassion, love
[활용]
churches
[의미]
왕가(들)(맛 16:18), 성전(들)(활 19:37)
all the churches: 모든 왕가들(롬 16:4; 코둘 8:18; 11:28; 계 2:23)
all the church: 온 왕가(활 5:11)(= the whole church: 전체 왕가, 롬 16:23; 코첫 14:23)
robbers of churches: 성전들을 강탈하는 자들(행 19:37)
[어원]
< OE circe < Gk kyriakon (doma) (house) of the Lord < Kyrios Lord
[사용횟수]
맛 16:18부터 계 22:16까지 114구절, 117회 사용됨.
[단어해설]
비블로스에서 가장 강력한 성취력을 갖는 이 단어는 실제로 단어의 의미 그대로 성취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영어 church가 건물과 종교조직의 의미로 사용되면서, 실제로 전 세계 기독교계가 종교 건물들과 죽은 종교 조직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특이하게도 ‘교회’(敎會)로 번역되면서, 온통 교역자(敎役者, 신부와 목사)의 가르침을 받는 모임의 교회들이 되고 말았다.
원래 이 단어는 비블로스 맛 16:18의 그리스어 에클레시아(ekklesia)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일반 백성들 가운데서 특별히 ‘불러낸 자들’(called out ones)을 의미하였다.
일반 백성으로의 부르심이라기보다는 백성 중에서도 ‘높은 부르심’(high calling, 필 3:14)을 받은 특유의 백성(a peculiar people, 신 14:2; 펱첫 2:9)을 의미하고 있다.
특별 소집된 민회(民會)를 의미하던 에클레시아는 바실리카(basilica), 곧 ‘왕의 집’(왕궁)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민회가 왕의 집에서 개최된 연유이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왕가(王家)를 암시하는 메시지도 들어있었다.
에클레시아 혹은 바실리카가 비블로스의 용례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그것은 점차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주님께 속한 ‘주님의 가족’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영어 church의 번역은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에클레시아와 바실리카가 쿠리아콘(kuriakon, 주님께 속한, 주님의 집) 개념으로 발전하면서, 주님의 집을 의미하는 church로 자리 잡게 되었다. 문제는 주님의 집이 건물 개념이냐 아니면 가족 개념이냐의 선택에 있었다.
바실리카 곧 왕의 집(house of the king)이 왕의 가족 즉 왕가(王家)를 가리켰듯이, 쿠리아콘 곧 주님의 집(house of the Lord)은 원래는 주님의 가족을 가리켰지만,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때부터 이 단어가 기독교인의 예배장소(예배당, 성당)라는 의미로 바뀌어 사용되었고, 그 영향으로 잉글랜드 민족 역시 주님의 집을 건물 개념으로 받아들였으며, 그 결과 영어 사전의 church의 의미가 가족 개념이 아닌 건물과 조직 개념으로 전락한 것이었다.
참고로 이 단어가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에 성당 혹은 예배당의 건물 개념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증거들은 다음과 같다; the Apostolical Constitutions(II. 59), a 300, the edict of Maximinus(303-13), cited by Eusebius(Eccl. Hist. IX. 10) a 324, the councils of Ancyra 314(Canon 15), Neo-Caesarea 314-23 (Can. 5), and Laoddicea (Can. 28).
윌리암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은 자신이 번역한 비블로스에서 church 대신에 congregation(회중)을 사용했는데, 그 당시에도 그가 church의 개념이 잘못되었음을 간파하였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틴데일 역시 회중 개념이 새유언(NT) 개념이 아닌 옛유언(OT) 개념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였고, 비블로스가 계시하는 이 단어의 정확한 의미가 ‘왕의 가족’, 즉 왕가(王家)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경우 이 단어가 히브리어 에다(eda, group)에서 출발하여 바빌론 포로 이후 그리스어 시나고그(synagogue, 회중)로 발전하였지만, 거기에 머물지 말았어야 했고, 신유언(NT)의 계시인 왕가의 개념으로 발전했어야 했다.
특유의 백성으로서의(펱첫 2:9) 높은 부르심은(필 3:14) 다름 아닌 왕들과 성직자들(계 1:6; 5:10), 즉 왕가로의 부르심이라는 것이 새유언(NT) 비블로스에서 분명히 드러난 계시이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 때부터 변질된 건물 개념의 church 대신에, 이스라엘의 시나고그 개념인 congregation을 선택한 것은 궤도이탈에서 궤도복귀로의 의미 있는 진전이라 하겠지만, 이미 완성된 비블로스에 명백히 제시되어 있는 왕가 개념을 아쉽게 놓친 것은 틴데일의 한계였다.
영어 비블로스에서 한글 비블로스로 번역되는 과정은 가장 강력한 성취력을 가진 이 단어를 위한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였다. 누구든지 영*의 인도를 정상적으로 받아서 이 단어의 정확한 의미와 비블로스의 용례를 바르게 이해하기만 하였더라도, 영어 비블로스의 한계를 뛰어넘어 가장 정확한 단어로 옮길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한글 비블로스는 이 단어를 교역자의 가르침을 받는 모임이란 뜻의 ‘교회’로 번역하였고, 적어도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바르게 고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교회라는 번역은 에클레시아 개념이나 회중 개념과도 거리가 멀었다. 토착 신앙인 무속신앙에서 무당의 역할을 신부나 목사의 역할로 대체시켰고, 신부나 목사 같은 영적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 모임을 교회로 인식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경우 에다에서 출발하여 시나고그에 머물렀지만, 신유언 비블로스는 그리스어 에클레시아 혹은 바실리카가 특유의 백성인 왕가라는 사실을 분명히 계시하고 있다. 잉글랜드 민족은 콘스탄티누스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주님의 집이란 뜻의 단어인 church에서 ‘집’을 ‘가족’이 아닌 건물 개념으로 받아들였고, 영어권에서 그나마 비블로스로 돌아가려는 온갖 영적인 운동들이 많이 있었지만, 여전히 congregation(회중) 개념에서 맴돌고 있는 실정이다.
한글 비블로스에서 ‘교회’라는 번역은 다소 엉뚱한 번역으로서, 다분히 토속신앙의 영향을 받은 개념이다. 기껏해야 무당을 대신한 영적 지도자 중심의 모임내지는 종교조직이라는 구태의연한 개념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이미 그 열매들이 어떤 나무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제라도 비블로스에 분명히 계시된 정확한 의미와 비블로스 용례에 따라서 바르게 번역할 필요가 있다. 일반 백성이 아닌 특유의 백성으로 불러내어, 주님과 함께 다스릴 왕들과 성직자들이 되게 하신 지극히 높은 부르심(high calling)이기 때문에, 주님의 가족 개념과 주님과 함께 다스릴 왕의 가족 개념인 ‘왕가’(王家)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사료된다.
혹자는 에클레시아의 어의를 살려 소회(召會)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계시의 발전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여전히 모임(회)의 개념에 머물러 있어서, 자칫 모임과 행사 개념으로 변질될 여지를 남기고 있다. 이제는 엘로힘*의 가족으로 밝혀졌고, 그것도 왕들로의 높은 부르심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가족 개념인 가(家)가 모임 개념인 회(會)를 대신해야 마땅하다. 이스라엘 민족의 회중(congregation, 시나고그) 역시 모임 개념이기에 모임과 종교적 행사로 치우친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임 개념이 없어진 것은 아니며, 히 12:23의 ‘총집합체’(general assembly) 역시 모임 개념이 맞다. 그것은 행사로서의 모임이라기보다는, 몸의 지체들이 결합되어 있듯이 그러한 생명의 결합 형태를 의미한다. 가족 개념 속에는 그 같은 생명결합의 모임 개념이 기본적으로 들어가 있다. 그것은 죽은 조직이 아니라 살아있는 유기체다. 따라서 왕가(王家) 하면 생명의 유기체로서의 모임 개념(결합체 개념)이 기본적으로 들어가 있고, 더더욱 발전된 계시의 완성으로서 왕의 가족이라는 본의가 살아 있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라 하겠다.
한글 비블로스에서 가장 강력한 성취력이 있는 이 단어가 바르고 정확하게 번역되고, 한민족이 바른 이해력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한국 땅에서 엘로힘*의 자녀다운 자녀들, 왕다운 왕들로서의 크리스천들이 영*의 열매로서 맺힐 것이며, 진정한 의미의 왕가들이 나타나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발휘하게 될 것이다.
[단어비교]
church: 왕가; congregation: 회중; assembly: 집합체
왕가의 성취가 교회의 성취와 어떻게 다른지 구체적인 사례와 모델을 비교해 보면 도움이 될 것임.
[활용]
devils, devilish
[의미]
마귀
have a devil: 마귀 들려 있다(맛 11:18; 뤀 8:27; 요 7:20; 8:48,52; 10:20,21)
had devils: 마귀들에 들려 있었다(뤀 8:27)
possessed with devils: 마귀들에게 점유당한(맛 4:24; 8:16,28,33; 9:32; 12:22; 맠 1:32; 5:15,16,18; 뤀 8:36)
devilish: 마귀적인(얔 3:15)
[어원]
< OE deofol < L diabolus < Gk diabolos devil, Satan
[사용횟수]
렙 17:7부터 계 20:10까지 106구절, 117회 사용됨.
[단어해설]
그리스어 비블로스에서는 다이모니아가 있고, 디아볼로스가 있는데, 영어 권위역 비블로스에 와서는 이 두 단어가 devil로 통일되었다. 이것은 계시의 발전인가 퇴보인가. 권위역 제임스 왕 비블로스가 안티오키아 비블로스이기 때문에 계시의 발전이며, 가장 정확하다. 권위역 비블로스를 제외한 모든 영어 역본들은 demon과 devil로 구분하여 번역하였다.
사실 다이모니아에 해당되는 demon은 진리가 아닌 무속신앙의 산물이다. devil과 구분된 demon을 주장하는 것은 무속신앙을 지지하는 것이다. 진리의 빛은 다이모니아든 디아볼로스든 똑같은 마귀의 정체성이라는 사실을 밝혀준다. 한글 비블로스에서 다이모니아를 귀신으로 번역해 준 역본들은 모두 무속신앙을 지지하고 있는 격이다. 안티오키아 비블로스라면 진리의 빛에 따라서 마귀로 통일하여 번역해야 옳다.
[단어비교]
devil, demon(권위역에는 없는 단어)
[활용]
faithful, faithfully, faithfulness, faithless, unfaithful, unfaithfully
[의미]
믿쁨(롬 5,10; 코둘 5; 히 11)
미쁨보다는 믿쁨이 faith의 용례에 적확하다. 실제로 faith가 믿음이란 의미와 융합되어 사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조어일지라도 정확성을 위하여 믿쁨으로 번역하는 것이 필요하다.
have faith in God: 엘로힘* 안에 있는 믿쁨을 가져라(맠 11:22)
through faith in his name: 그분의 이름 안에 있는 믿쁨을 통해서(활 3:16)
the faith in Christ: 크리스토스* 안에 있는 믿쁨(활 24:24)
by faith that is in me: 내 안에 있는 믿쁨에 의하여(활 26:18): that is 나 which is가 있는 경우는 안에 있는 믿쁨으로 번역해야(갈 3:26의 by faith in Christ Jesus는 Tyndale 비블로스의 by the faith which is in Christ Jesus란 표현처럼 크리스토스* 예수스* 님 안에 있는 믿쁨으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
by faith of Jesus Christ: 예수스 크리스토스의 믿쁨에 의해(롬 3:22)
my faith: 나의 믿쁨(계 2:13)
faithful: 믿쁨찬(숫 12:7; 삼첫 2:35; 22:14; 삼둘 20:19; 네 7:2; 9:8; 13:13; 시 12:1; 31:23; 89:37; 101:6; 119:86,138; 금 11:13; 13:17; 14:5; 20:6; 25:13; 27:6; 28:20; 사 1:21,26; 8:2; 단 6:4; 호 11:12; 맛 24:45; 25:21,23; 뤀 12:42; 16:10,11,12; 19:17; 활 16:15; 코첫 1:9; 4:2,17; 7:25; 10:13; 갈 3:9; 엪 1:1; 6:21; 콜 1:2,7; 4:7,9; 살첫 5:24; 살둘 3:3; 팀첫 1:12,15; 3:11; 4:9; 6:2; 팀둘 2:2,11,13; 팉 1:6,9; 3:8; 히 2:17; 3:2,5; 10:23; 펱첫 5:12; 계 1:5; 2:10,13; 3:14; 17:14; 21:5; 22:6), 믿쁨차신(다 7:9; 사 49:7; 렘 42:5; 히 11:11; 펱첫 4:19; 요첫 1:9; 계 19:11), 믿쁨 가득한, 믿쁨 있는, 믿쁜
faithfully: 믿쁨차게(왕둘 12:15; 22:7; 연둘 19:9; 31:12; 34:12; 금 29:14; 렘 23:28; 요셋 1:5), 믿쁨 있게, 믿쁘게
faithfulness: 믿쁨참(삼첫 26:23; 시 5:9; 89:24,33; 92:2; 사 11:5; 호 2:20), 믿쁨차심(시 36:5; 40:10; 88:11; 89:1,2,5,8; 119:75,90; 143:1; 사 25:1; 렘애 3:23), 믿쁨 충만함, 믿쁨성
faithless: 믿쁨 없는(맛 17:17; 맠 9:19; 뤀 9:41; 요 20:27)
unfaithful: 믿쁨차지 않은(금 25:19)
unfaithfully: 믿쁨차지 않게(시 78:57)
[어원]
< OF feid, feit faith < L fidem trust, belief; 동계어 fidelity
[사용횟수]
숫 12:7부터 계 22:6까지 338구절, 362회 사용됨.
faith는 다 32:20부터 계 14:12까지 총 231구절, 247회 사용되며, OT에선 단지 다 32:20(믿쁨 없는 자녀란 부정적 의미)과 하박쿡 2:4(예언적 성격)의 두 곳뿐이며, NT에 229구절, 245회 사용됨.
[단어해설]
창조주의 명령의 말씀을 배반하여 어긴 것이 죄의 출발이었듯이, 신뢰관계를 배반하여 깨트리는 것이 곧 죄이다. 모든 것의 기초가 신뢰이기에, 신뢰가 무너지면 창조의 기본질서가 무너진다.
타락한 인간이긴 하지만 선택을 못할 정도의 전적인 타락은 결코 아니다. 타락한 인간에게서 난 불완전한 신뢰 대신에 창조주에게서 난 완전하고 영원한 신뢰를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타락과 죄에 대한 근본 해결책이며, 그것이 바로 구원의 희소식이다!
자유의지의 선택을 통해서 구원의 희소식을 받아들인 사람은 새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되는데, 옛사람 아담의 생명과는 전혀 다른 새사람 예수스 크리스토스의 생명이다.
바로 그 새 생명의 본질적 특성이 신실성(faithfulness, 믿쁨참)이고, 거기서 나온 결실이 믿쁨(faith)이다. 완전히 믿을만하기에(faithful) 당연히 믿는 것(believing)이 곧 믿쁨(faith)이다. 창조주의 본성인 미쁨(faithfulness)과 인간의 본성인 믿음(believing)이 결합되어 하나가 된 신비가 다름 아닌 ‘믿쁨’인 것이다.
영어 ‘faith’를 한글로 ‘믿음’이라 번역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창조주의 본성을 제거한 채 오로지 인간의 본성만 남겨 놓으면 구원이 성립될 수 없다. 전 세계 모든 종교들이 안고 있는 근본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아무리 인간의 노력을 총동원한다 하여도 구원에 이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창조주의 거룩한 본성에 영원히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원의 유일한 길은 창조주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이 만나 하나가 되는 신비의 희소식뿐이다!
예수스 크리스토스의 십자가 죽음이 타락과 죄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였기에 비로소 창조주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이 만날 수 있었고, 신성화의 신비가 완성되어 유일한 구원의 길이 열렸으니, 그 열쇠가 바로 ‘믿쁨’인 것이다.
단지 ‘믿음’(believing)만으로는 죄 사함이 불가능하며, ‘믿쁨’(faith)이어야만이 비로소 죄 사함이 성취될 수 있다. 단지 ‘믿음’만으로는 구원이 성립되지 못하지만, ‘믿쁨’으로는 구원이 필요충분하게 성립된다.
그리스어 피스티스(pistis)는 진정시키고 설득시켜 신뢰를 갖게 한다는 의미인데, 이는 깨어진 신뢰로 인한 분노와 화해를 통한 신뢰회복을 전제로 한다. 이 단어가 라틴어 피데스(fides)를 거쳐 영어 훼이스(faith)로 옮겨왔는데, 단순히 믿는 행위(believing)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배신에 대한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한 사죄의 근거와 논리적이고 법적인 사면을 통한 설득력, 그리고 회복된 신뢰관계를 함축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창조주의 용서와 사면을 전제로 한 신뢰회복, 그리고 재발방지를 위한 근본대책인 새 생명에 근거한 새로운 믿음의 행위를 내포하는 것으로서, 창조주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가 만나는 신비의 해결책인 셈이다.
이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그리스인, 로마인, 영어권 사람들은 그저 두루뭉술하게 뭉뚱그려서 일반적인 믿음(believing), 신조(belief), 신뢰(trust) 개념과 동일시해 버리곤 하지만, 정확한 의미와 개념을 확인해 보면 놀라운 ‘믿쁨’의 신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영어 훼이스(faith)에서 한글로 옮기면서 ‘믿음’을 거쳐 ‘믿쁨’으로 발전한 것은 원래의 제자리를 찾는 과정상의 놀라운 쾌거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단어야말로 모든 것을 여는 가장 중요한 열쇠로서 비블로스 안에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어의론(etymology)으로 접근하여도 알 수 있다. 믿다(believe)란 동사의 명사형은 ‘믿음’(believing)이란 동명사 혹은 신조(belief)이다. 어디까지나 인간의 동작의 행위를 가리키며, 아담의 옛 생명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예수스 크리스토스의 새 생명은 본질과 근본이 다르다. 동사가 아닌 형용사인 미쁜(faithful)의 명사형은 미쁨(faith)이다. 이는 동작의 행위가 아닌 본질과 상태의 결정체이다. 즉 예수스 크리스토스의 새 생명의 본질적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에 그 자체로서 얼마든지 믿을만하고, 완전히 신뢰할 정도로 매력적이다. 아담의 생명으로 최선을 다해 믿으려는 행위와 창조주의 새 생명의 믿을 수밖에 없는 본질은 실로 천양지차이다.
문제는 새 생명의 본질이 인간의 믿음의 행위와 만나지 않고서는 아무 효력도 의미도 없다는 데 있다. 따라서 새 생명의 본질인 미쁨과 인간의 믿음의 행위가 만나서 하나가 된 믿쁨(믿음 + 미쁨)이야말로 비블로스가 계시하는 신성화의 신비인 것이다.
자연인은 피스티스와 훼이스를 인간에 속한 인간의 신앙행위로 이해하기에 믿음으로 해도 무방하겠지만, 적어도 비블로스에서는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비블로스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비블로스에서는 그리스어 피스티스와 영어 훼이스가 인본주의적 믿음 개념이 아니고 신성화의 신비인 믿쁨 개념이라는 사실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그것을 놓치는 것은 모든 것을 놓치는 것이고, 그것을 얻는 것은 모든 것을 얻는 것이다.
비블로스의 믿쁨에는 세 종류가 있다:
1. 교리로서의 믿쁨(갈 1)
2. 엘로힘*의 약속, 진리, 신실하심으로서의 믿쁨: 믿쁘심(롬 3:3)
3. 주님의 믿쁨: 맠 11:22; 활 24:24; 롬 3:25; 갈 2:16, 20; 3:26; 엪 1:15; 3:12; 필 1:27; 3:9; 콜 1:4; 2:5,12; 팀둘 1:13; 3:15; 약 2:1 특히, 활 26:18의 “sanctified by faith that is in me”와 팀둘 1:5의 “the unfeigned faith that is in thee”를 비교; 또한 팀첫 1:14; 3:13; 유 1:3; 계 2:13; 14:12도 유의.
"the faith of the saints"(계 13:10)와 "the faith of Jesus"(계 14:12)에서 전자는 믿쁨의 주체가 성도란 의미이지만, 후자는 예수스 님이 믿쁨의 주체가 되는 경우이다. “예수스 님의 믿쁨”으로 번역한다면, 그 경우에는 예수스 님이 믿쁨의 창시자(히 12:2) 혹은 기원, 시혜자란 뜻이 된다(활 3:16; 26:18; 엪 2:8; 살첫 1:8; 계 2:13).
[단어비교]
faith: 믿쁨; belief: 신조; believing: 믿음
faithful: 믿쁨찬; sincere: 성실한
[활용]
feasted, feasting, feasts
[의미]
잔치(탈 5:1; 10:9; 12:14; 13:6; 맛 23:6; 27:15; 뤀 2:42; 요 2:9; 코첫 5:8; 10:27; 유 1:12)
잔치하다(펱둘 2:13; 유 1:12)
held a feast: 잔치를 거행하다(왕첫 8:65)
feast day: 잔칫날(시 81:3; 맛 26:5; 맠 14:2; 요 2:23), 잔치의 날들(암 5:21)
feasting: 잔치하는(테 9:17,18,19,22; 욥 1:5; 전 7:2; 렘 16:8)
make a feast: 잔치를 베풀다(겐 19:3; 21:8; 26:30; 29:22; 40:20; 왕첫 3:15; 테 1:3,5,9; 2:18; 회 10:19; 단 5:1; 뤀 5:29; 14:13), 잔치를 벌이다(렘 51:39)
hold a feast: 잔치를 거행하다(탈 5:1; 10:9; 왕첫 8:65), 잔치를 개최하다(삼첫 25:36)
ordain a feast: 잔치를 정하다(왕첫 12:32,33)
feasts of charity: 새사랑의 잔치들(유 1:12: 비블로스에 한 곳뿐)
a feast to the LORD: *주*를 위한 잔치(탈 12:14; 13:6; 32:5)
the feast of unleavened bread: 뜸씨 없는 빵의 잔치(탈 12:17)
the feast of harvest: 수확잔치(탈 23:16)
the feast of ingathering: 수장잔치(탈 23:16)
the feast of the weeks: 칠칠잔치(탈 34:22)
the feast of the passover:넘어감 잔치(탈 34:25)
the feast of tabernacles: 장막들의 잔치(렙 23:34; 요 7:2)
the feast of the seventh month: 칠월잔치(네 8:14)
the feast of the seven days: 칠일잔치(켈 45:25)
the feast of the dedication: 헌납잔치(요 10:22)
the day of pentecost: 오순잔치(활 2:1)
[어원]
< L festum, holiday < festus, solem, festal: 동계어: festival
[사용횟수]
겐 19:3부터 유 1:12까지 145구절, 163회 사용됨.
[단어해설]
feast는 절기나 축제보다는 잔치의 의미가 강하다. 잔치(feast)는 금식(fast)과 상반된 개념으로서, 즐거운 마음으로 기념하고 서로 간에 벽을 허물며,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을 만끽하는 시간이다.
무엇보다도 비블로스의 용례에서 feast는 절기나 축제와는 맞지 않고, 잔치의 뜻이 가장 적합하다. 가령 비블로스에 잔치를 베푼다(make a feast)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이것이 절기나 축제로 이해할 수 없는 경우들임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같은 단어를 통일하여 일관되게 잔치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각종 절기들을 지키면서 그 근거를 비블로스에 두는 것은 명백한 오류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의 잔치:
1. 속죄일, Day of Atonement(히브리력 7월 10일, 렙 16:29; 23:27,28; 25:9; 숫 29:7)
2. 장막잔치, Feast of Tabernacles(히브리력 7월 15-22일, 렙 23:33-36; 39-43; 숫 29:12-32; 다 16:13-16; 라 3:4; 쪀 14:16,18-19)(= Feast of Booths)
3. 헌납잔치(수전제, Feast of Dedication, 요 10:22: 비블로스에 한 곳뿐, =Feast of Lights = Hanukkah)
4. 희년(숫 36:4), 희년의 해, Year of Jubile(매 49년 혹은 일곱 삽바쓰 다음해, 렙 23:15,16; 25:8-55; 27:14-24; 렘 34:8,14-17; 사 61:1,2)
5. 새달, New Moon(탈 40:2,17; 숫 10:10; 28:1-10,11-15; 시 104:19)(=월삭)
6. 넘어감과 뜸씨 없는 빵의 잔치, Passover(히브리력 정월<아빕월/니산월> 14일) and the feast of Unleavened Bread(히브리력 정월 15-21일, 탈 12:1-13:16; 23:15; 34:18-20,25; 렙 23:4-14; 숫 28:16-25; 다 16:1-8; 슈 4:19-23; 5:10-12)
7. 오순잔치(활 2:1; 20:16; 코첫 16:8), Pentecost = Feast of Weeks(칠칠잔치) = Feast of Harvest(수확잔치, 히브리력 3월 16일, 탈 23:16; 34:22; 렙 23:15-21; 숫 28:26-31; 다 16:9-12; 연둘 8:13)
# the feast of ingathering: 수장잔치(탈 23:16; 34:22)
8. 푸림잔치, Feast of Purim(테 3:7; 9:24,26,28,29,31,32)
9. 삽바쓰와 삽바쓰해, Sabbath and Sabatical Year(탈 16:22-30; 20:8-11; 23:12; 31:12-16; 34:21; 35:2,3; 렙 23:3; 26:2; 숫 15:32-36; 28:9,10; 다 5:12-15)
10. 나팔잔치, Feast of Trumpet(히브리력 7월 1일, 렙 23:24,25,27-32; 숫 29:1-40)(=Seventh Month festival)
[단어비교]
feast, festival, banquet
[활용]
generations
[의미]
생명세대(들)(겐 2:4; 5:1; 6:9; 맛 1:1) 혹은 생명의 열매,
시간 개념이 들어갈 경우에는 생명대 혹은 생명세대(동시대에 공통된 생명을 가진 사람들을 의미하거나, 부모의 뒤를 이어 자기 자식에게 생명을 물릴 때까지의 시간을 의미하는데 보통 30년에서 40년으로 계산하기도 한다.)(활 8:33; 13:36; 히 3:10; 펱첫 2:9)
genesis: 게네시스 - generation의 그리스어는 게네시스이다. 생성, 출생은 곧 생명의 시작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본성, 기원 등의 의미도 파생되었다.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생명 세대부터 생명 세대까지(탈 17:16; 사 3:20; 34:10,17; 51:8; 렘 50:39; 렘애 5:19; 단 4:3,34; 욜 3:20; 뤀 1:50), 대대로
from this generation forever: 이 생명 세대로부터 영원하도록(시 12:7)
[어원]
< L generdre, produce < genus, kind: 동계어 general, genus, degenerate
[사용횟수]
겐 2:4부터 펱첫 2:9까지 206구절, 225회 사용됨.
[단어해설]
권위역 비블로스에서 generation은 그리스어의 genesis(생명의 시작, 기원: 맛 1:1)와 gennema(낳다, beget: 맛 3:7; 12:34; 23:33; 뤀 3:7)와 genos(종자, 민족: 펱첫 2:9)에 어원을 두고 있는 독특한 단어로서, “최초로 생명이 태동되어 이루어진 민족”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겐 1:1이 옛 생명으로 된 세상의 시작을 의미한다면, 맛 1:1은 새 생명으로 된 세상의 시작을 의미하며, 새 생명으로 된 세상은 예수스 크리스토스의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난 한 새로운 민족의 등장을 의미한다(펱첫 2:9; 활 8:33).
OT에서 generations는 하늘들과 땅의 생명의 열매들(겐 2:4)에서 시작하여 아담의 생명세대(겐 5:1), 노아흐의 생명세대(겐 6:9), 쉠의 생명세대(겐 11:10), 테라흐의 생명세대(겐 11:27), 이사악의 생명세대(겐 25:19), 야코브의 생명세대(겐 37:2) 등 일곱 생명세대(generations)로 대표되며, 아아론과 모세스의 생명세대(숫 3:1), 파레쯔(다비드 가문)의 생명세대(루 4:18)가 추가로 언급되고 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이쉬마엘의 생명세대(겐 25:12)와 에사우의 생명세대(겐 36:1)가 언급되기도 한다.
NT에서는 단 하나의 독특한 생명세대가 계시되고 있는데, 바로 예수스 크리스토스의 생명세대로서(맛 1:1), 비블로스는 이 예수스 크리스토스의 생명세대를 거룩한 민족을 이루고 있는 택함 받은 특별한 생명세대로 밝히고 있다(펱첫 2:9). 모든 시대를 망라하여 믿쁨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예수스 크리스토스의 생명세대에 속하게 된다. 반면, 부정적 의미에서 NT 시대의 이 생명세대(this generation, 맛 11:16)는 사악한 생명세대요(this wicked generation, 맛 12:45), 간음하고 죄 많은 생명세대요(this adulterous and sinful generation, 맠 8:38), 악한 생명세대요(this is an evil generation, 뤀 11:29), 구부러진 생명세대이다(this untoward generation, 활 2:40).
요컨대, 권위역 비블로스에서 generation은 그 독특한 의미의 용법으로써 특징지워진다. 물론 일반적 의미에서 generation이 genealogy의 구성 요소로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연첫 5:7; 7:9), 대부분의 경우는 genealogy, family, lineage, pedigrees 등과 구분되는 독특한 개념임에 유의해야 한다.
* 정리해 보면,
generation: 생명세대(맛 1:1)
genealogy: 생명족보(라 8:1)
family: 가족(숫 36:12)
lineage: 혈통(뤀 2:4)
pedigrees: 가계도(숫 1:18)
## 요컨대 generation에는 생명의 시작, 생명의 세대, 생명의 열매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참고로 영어 단어 자체가 긴 것처럼 우리말도 좀 긴 것이 좋다고 본다. 즉 그냥 세대보다는 생명세대라 표기하는 것이 의미도 분명해지고 모양새도 더 바람직하다 하겠다.
[단어비교]
[활용]
[의미]
비블로스의 첫 번째 책 이름.
[어원]
<Gr. genesis < L. genesis < En. genesis
[사용횟수]
비블로스 전체에서 첫 번째 책 이름으로 단 한 번 사용됨.
[단어해설]
원래 히브리어 비블로스에서는 ‘베레쉬트’ 즉 시작의 책으로 알려져 있다.
이방인 비블로스 시대가 개막되면서 안티오키아 크리스토스 사람들은 히브리어 책 제목인 베레쉬트를 시작의 책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어 ‘게네시스’를 책 제목으로 붙인 다음 이것을 라틴어로 ‘게네시’라고 음역하기 시작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단순히 비블로스 첫 번째 책, 첫 구절, 첫 마디를 책 제목으로 붙였지만, 안티오키아 크리스토스의 사람들은 신유언 첫 번째 책, 첫 구절, 첫 마디인 ‘비블로스 게네시스’의 게네시스를 구유언 첫 번째 책 제목으로 붙였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새유언 시대의 개막은 옛유언 시대를 끝내거나 지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맛 1:1의 비블로스 게네시스가 의미하는 것은 새유언과 옛유언을 합친 비블로스 전서의 시작이 바로 게네시스라는 것이다. 따라서 비블로스 전서의 시작인 옛유언 첫 번째 책의 제목은 당연히 ‘게네시스’가 되어야 마땅하다.
게네시스는 그리스어로서 히브리어 베레쉬트를 번역한 것이 아니라 원래 게네시스가 바른 제목이라는 것이다. 인류의 언어가 하나의 언어였을 때, 또는 하나의 언어로 회복되었을 때를 가정한다 하여도 베레쉬트가 아닌 게네시스가 맞다는 것이다. 이 경우는 히브리어보다는 그리스어가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표현하였고, 따라서 그리스어 게네시스가 언어회복 이후에도 영구히 지속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번역이 아닌 음역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게네시스는 영원히 지속될 책 제목으로서 비블로스 전서를 여는 첫 실마리가 된다.
따라서 새 유언 시대 이후로부터는 비블로스 전서 첫 책의 제목인 게네시스를 번역하지 않고 음역하는 것이 대원칙이라 할 수 있다.
이방인 시대의 개막과 함께 비블로스 번역 시대가 개막되면서 안티오키아의 크리스토스 사람들은 구라틴어 비블로스를 번역하면서 게네시스를 라틴어로 ‘게네시’(Genesi, 라틴어 탈격) 라고 음역해 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영어 비블로스로 넘어오면서 역시 음역의 원칙에 따라서 ‘제네시스’(Genesis) 라고 음역해 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비블로스 첫 번째 책을 단순히 시작의 책으로만 이해했다. 시간의 시작과 함께 창조의 시작, 생명의 시작을 계시해 준다고 보았다. 하지만 안티오키아의 크리스토스 사람들은 여기에 머물지 않았고, 이 모든 시작들이 결국은 예수스 크리스토스의 생명세대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었다.
그런데 영어 비블로스(바이블)에서는 첫 번째 책 제목을 음역하여 ‘제네시스’(Genesis) 라고 한 반면, 정작 새 유언 첫 번째 책에서는 이를 음역하지 않고 번역하여 ‘제너레이션’(generation) 이라 하였다.
‘제너레이션’은 생명이 어떻게 존재하기 시작하였는가를 보여주는 매우 독특한 단어이다. 즉 출생의 신비를 보여주면서 여기에 시작이라는 시간 개념을 적용하여 생명의 시대 혹은 생명의 세대라는 개념이 창출된다. 왜냐하면 생명의 계승에는 자연스럽게 시간개념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부모의 생명에서 자식의 생명으로 이어지는 과정에는 인간의 수명 계산이 필수적이며, 인간의 수명은 곧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일반적으로 ‘제너레이션’을 ‘세대’ 라고 번역하고, 한 세대를 30년 혹은 40년으로 계산하기도 하지만 이는 한참 파생된 후의 의미라 할 수 있고, 보다 정확히 하면 기본적으로 생명 개념을 바탕으로 ‘생명세대’ 라고 번역해야 옳을 것이다.
그리스어 게네시스(영어 제네시스)를 한글로 ‘창세기’ 라고 번역한 것은 크나큰 실수이다. 물론 세상 창조의 기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 50장 중에서 단지 1장에 불과하며, 자세히 내용의 전개를 살펴보면, 만물의 기원이나 창조의 근본을 밝히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나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이다.
시간의 시작을 의미하는 베레쉬트를 ‘태초에’ 라고 번역하여 ‘창세기’와 오역 세트를 이룬 것은 실로 이만저만한 실수가 아니다.
일단 책 제목부터 번역이 아닌 음역의 원칙에 따라(그것도 히브리어 음역이 아닌 그리스어 음역으로서) ‘게네시스’로 정정해야 마땅하며, 그런 다음에는 게네시스의 올바른 의미가 무엇인지를 하나하나 상고해 나가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게네시스는 생명의 시작을 의미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예수스 크리스토스의 생명세대가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보여주는 단어이다. 게네시스에는 새로운 종류의 생명에 대한 정확한 설계도가 담겨 있는 셈이다.
오늘날 유전자 지도 혹은 설계도를 의미하는 게놈(genom)이란 단어도 유전자를 뜻하는 겐(gen)과 염색체를 뜻하는 크로모좀(chromosom)의 일부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말인데, 게네시스와 비슷한 개념의 단어라 할 수 있다. 생명의 본질적 특성이 계승된다는 관점에서 gene(유전자)이란 개념이 생겼는데, 비블로스에서 종류별로 창조된 생명들이 종류별로 재생산되는 것도 gene의 개념을 설명해 준다 하겠다.
[단어비교]
genesis: 게네시스(생명의 시작); generation: 생명열매 혹은 생명세대; genealogy: 생명족보 등으로 구분하여 번역할 필요가 있다.
[활용]
Ghost
[의미]
숨(혼과 영을 포함하는 생명의 본질).
거룩하신* 숨*(Holy Ghost, 맛 1:18), give up the ghost, 숨을 포기하다(겐 25:8,17; 35:29; 욥 3:11; 10:18; 11:20; 13:19; 14:10; 렘 15:9; 렘애 1:19; 맠 15:37,39; 뤀 23:46; 요 19:30; 활 5:5; 12:23), yield up the ghost, 숨을 내어주다(겐 49:33; 맛27:50; 활 5:10)
[어원]
< OE. gast, spirit: Ger. geist. cf. ghastly, terribly
[사용횟수]
겐 25:8부터 유 1:20까지 108구절, 109회 사용됨.
[단어해설]
흔히들 ‘ghost’를 죽은 사람의 혼(the soul of a deceased person)으로 이해하여 ‘유령’(apparition or phantom)이라 부르지만, 원 뜻은 오히려 산 사람의 ‘호흡’ 혹은 ‘숨’을 의미한다.
비블로스에서는 후자의 경우로만 쓰였다. 사람의 숨(호흡)으로서의 ‘ghost’는 육체와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영(spirit)과 혼(soul)을 포괄하는 생명의 본질을 가리킨다.
비블로스에서 첫 언급은 겐 25:8에서 아브라함*이 숨을 포기하였다(gave up the ghost)고 할 때 사용되었다.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 가바(gava)는 "숨이 멎다, 죽다, 소멸되다"를 뜻한다.
마지막 언급인 유 1:20에서는 거룩하신* 숨*(Holy Ghost) 안에서 간청하라고 하였다. 여기서 숨*에 해당되는 그리스어 프뉴마(pneuma)는 "영, 숨, 바람" 등을 뜻하는데, 문맥과 용례에 따라서 영으로도 번역되고(맛 3:16), 바람으로도 번역되며(요 3:8), 숨으로도 번역된다(맛 27:50).
영어 어원은 영이란 의미에 가깝기에 한글로 유령이란 번역을 야기하였으나, 비블로스 용례는 오히려 인간의 콧구멍을 쉴새없이 넘나드는 생명의 바람, 즉 숨(호흡)의 의미가 확인되고 있다. 숨의 생명에는 영뿐 아니라 혼도 포함된다.
따라서 ghost를 영으로만 번역하면 인간의 혼이 배제되기에 정확한 번역이라 볼 수 없다.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겐 2:7에서 처음에 인간을 만드실 때에, 인간의 콧구멍 속에 불어넣으신 엘로힘*의 숨이 ghost의 첫단추라 이해하면 된다.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는 나파크(naphach)인데, 숨을 세게 불어넣는다는 의미이다.
엘로힘*의 숨을 인간의 콧구멍에 세게 불어넣자 인간이 산 혼(a living soul)이 되었고, 그 결과 인간의 정체성은 혼이 되었으며, 동시에 혼과 결합된 인간의 영이 엘로힘*의 영과 소통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비블로스 개념에서 ghost는 혼에 방점을 둔 인간의 숨으로서, 혼과 영을 포함한 개념이라는 점에서 영(spirit)과 구분된다. 당연히 Holy Ghost(거룩하신* 숨*)도 인간의 숨 속에서 활동하시는 엘로힘*의 영*을 가리키므로, Holy Spirt(거룩하신* 영*)과는 구분되어야 마땅하다.
[단어비교]
Holy Ghost(거룩하신* 숨*): 숨(ghost)에는 영뿐 아니라 영과 혼이 포함되어 있다. 거룩하신* 숨*은 사람의 혼과 함께 호흡하는 영*을 의미한다.
권위역 비블로스만의 독특한 표기인 Holy Ghost(거룩하신* 숨*)는 맛 1:18에서 처음 사용되고 유 1장 20절에 마지막으로 사용되어, 예수스*의 탄생부터 왕가(교회)시대까지의 사역과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Holy Ghost는 예수스*의 영광을 위해 주어졌고(요 7:39), 예수스*의 이름으로 오신 'Comforter’(위로자*)로서(요 14:26), 엘로힘*이시기도 하다(요일 5:7).
권위역 비블로스에서는 ‘Holy Spirit’(성령, 거룩하신* 영*)이란 표기가 단 한 번 뤀 11:13에서만 “선물”(gift)의 의미로 사용된 반면, Holy Ghost는 무려 90번이나 사용되었다.
‘Holy Spirit’(성령)은 기독교 안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지만, 엘*의 자녀들에게 주신 선물로서의 대표적 명칭일 뿐, 말씀기록에서는 실제로 ‘Holy Ghost’(거룩하신* 숨*)라는 명칭이 대부분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엘*의 자녀들의 숨 속에서 함께 숨 쉬는 분으로서 이해해야 그분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따라서 왕가(교회)란 거룩하신* 숨*과 함께 숨 쉬는 무리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영(spirit)은 새로 난 생명을 통해서 거룩한 영(holy spirit)이 될 수 있다(시 51:11). 거룩하신* 숨*의 다른 명칭은 엘로힘*의 영*(the Spirit of God), 곧 영*(Spirit)이시다.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영*(Spirit)이시므로 거룩한 영*(holy Spirit)이라 칭하기도 한다(사 63:10,11; 엪 1:13; 4:30; 살첫 4:8). 다시 말하지만, 성령(Holy Spirit)은 비블로스 전체에서 단 한 번 선물의 의미로서 언급된 대표적 명칭일 뿐이며, 실제로는 거룩하신* 숨*, 혹은 영*으로 칭하는 것이 맞다. 기독교에서 수도 없이 성령, 성령, 성령을 외치는 것은 말씀기록도, 엘로힘*의 뜻도 모르기 때문에 오해와 착각을 한 증거일 뿐이다.
자녀들에게 주신 선물로서의 성령(Holy Spirit)은 거룩하신* 숨*으로서 함께 숨 쉬는 분이시며, 사람의 영과 하나가 되어 활동하시는 영*(Spirit)께서는 예수스 크리스토스의 영*으로서(필 1:19) 엘*의 자녀들을 홀로 두지 않으시고 위로자(Comforter)로서 늘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요 14:16,26; 15:26; 16:7).
[활용]
[의미]
모기(맛 23:24)
strain at a gnat, and swallow a camel: 모기에는 긴장하고, 낙타는 삼킨다(맛 23:24)
[어원]
[사용횟수]
맛 23;24에 1구절, 1회 사용됨.
[단어해설]
옥스퍼드 영영사전에 따르면, gnat은 학명 Culex pipiens에 속하는 두 날개를 가진 날파리로서, 암놈은 날카롭고 긴 주둥이로써 동물의 가죽을 뚫고는 피를 빨아먹으며, 미국에서는 흔히 모기로 통한다(Culex mosquito).
옥스퍼드 영영사전 strain 항목 21에서 “strain at”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to strain at: to make a difficulty of ‘swallowing’ or accepting (something); to scruple at. Also (rarely), “to strain to do” something.
삼키거나 (어떤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들다, 마음에 걸려하다, 혹은 (드물게), “어떤 일 하기를 주저하다”
This use is due to misunderstanding of the phrase ‘strain at’ a gnat in Matt. xxiii. 24. It has been asserted that ‘straine at’ in the Bible of 1611 is a misprint for ‘straine out’, the rendering of earlier versions(see 14e). But quots. 1583 and 1594 show that the translators of 1611 simply adopted a rendering that had already obtained currency. It was not a mistranslation, the meaning intended being `which strain the liquor if they find a gnat in it`. The phrase, however, was early misapprehended (perh. already by Shaks. in quot. 1609), the verb being supposed to mean to make violent effort(see sense 18).
이 용법은 맛 23:24의 “strain at a gnat”이란 구절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되었다. 1611년판 비블로스의 ‘strain at’은 초기 역본들을 옮기는 과정에서 ‘strain out’을 오기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1583년과 1594년 인용문이 보여주듯이, 1611년 역자들은 단지 당시에 이미 통용되던 용법을 채택하였을 뿐인 것이다. 그것은 오역이 아니었으며, ‘술에 모기가 발견되면 여과한다’는 의미를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문구가 초기부터 잘못 이해되어(아마도 1609년 세익스피어 인용문에서 이미 오용된 듯함) 그 동사가 ‘과격하게 노력하다’는 의미로 간주된 것 같다(18번 의미를 참조).
[1583 Greene Mamillia ii. B 3 b, Most vniustly straining at a gnat, and letting passe an elephant.
1594 J. King On Jonas (1599) 284 They have verified the olde proverbe in strayning at gnats and swallowing downe camells.
1611 Bible Matt. xxiii. 24 Ye blind guides, which straine at a gnat, and swallow a camel.]
1609 Shakes. Tr. & Cr. iii. iii. 112 (Qo. 1) Vliss. I do not straine [Fol.(hypermetrically) straine it] at the position, It is familiar, but at the authors drift.
1670 South Serm. (1727) III. 110 He who hates his Enemy with a Cunning equal to his Malice, will not strain to do this or that good Turn for him, as long as it does not thwart..the main Design of his utter Subversion.
1677 R. Witty Gout Raptures To Rdr. A 5b, If any man strain at the Verse which is not in the usual mode, let him read the Lyrick Poets in Greek, who I think have taken more liberty then I.
1737 Gentl. Mag. VII. 546 The old Proverb, Strain at a Gnat, and swallow a Camel.
## 옥스퍼드 영영 사전이 밝힌 바와 같이, strain at이나 strain out이나 “신경을 쓴다”는 공통적 의미에서 일치하며 오역이나 오기의 문제는 아니다. 신경 써서 걸러내느냐 아니면 단지 신경쓰는 것 자체이냐의 차이일 뿐이다. 따라서 어느 하나를 오역이나 오기로 말할 수는 없는 문제다.
그러나, 이는 단지 문자적 의미와 용법상의 관점에서 그러할 뿐이다. 내용상의 문제로 들어가면 문맥과 함께 고려해야 할 주안점이 무엇이냐에 따라 보다 정확한 표현이 무엇인지가 판가름 나게 된다.
흔히, 모기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킨다는 의미 해석이 우세한 것은, 법상의 부정한 동물에 대한 관념과 걸러내고 삼킨다는 개념상의 대비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격언이 주께서 지적한 내용과 일치하느냐가 보다 중요한 관건이라 할 수 있다. 즉 십일세 문제와 같은 사소하면서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사안과 십일세의 본질 문제인 보다 큰 문제 사이의 대비를 본 격언과 비교해 보아야 한다.
부정 개념과 유다인 풍습상의 문제로 국한시키기에는 십일세 문제를 과연 파리사이오스*인들이 걸러내었느냐 하는 것은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그들은 걸러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경써서 지키느라 혼신을 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기는 걸러내고’로 하면 이런 의미와는 모순을 일으키게 된다.
제임스 왕 역자들은 이 점을 간과하지 않았고, 디윌리조의 기본 의미인 신경 쓰다, 긴장하다에서 열쇠를 찾았던 것같다. 즉, 단지 걸러낸 것이 아니라 걸러내기 이전 상태인 신경을 곤두세우고 긴장하여 지키려고 애쓰는 상태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당시의 용례로 보더라도 걸러내다는 strain out도 사용되고 기본의미인 strain at도 사용되고 있었음은 옥스퍼드 사전도 증거하고 있다. 따라서 제임스 왕 역자들이 여기서 기본의미를 택한 이유를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단어와 문법상으로는 ‘걸러내다’와 ‘긴장하다’ 둘다 틀리지 않는다. 문제는 법적 부정 개념이 적용되느냐 아니면 격언과 실제상황의 일치에 주안점이 있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따라서 ‘걸러내다’로 번역한 역본들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제임스 왕 비블로스의 “긴장하다”는 번역이 보다 정확하고, 전후문맥과 의미에 일치한다 할 것이다. 이는 gnat의 의미와도 상합되는 것이다. 단지 부정하고 하찮은 하루살이 정도라면 걸러내는 것이 어울리겠지만, 적어도 날카롭고 긴 주둥이로 공격하는 모기라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gnat는 당연히 후자이므로, 이 역시 제임스 왕 비블로스의 정확성을 뒷받침해 준다 하겠다.
[단어비교]
[활용]
GOD, God's, Gods, Godhead, God-ward, god, gods, goddess
[의미]
엘로힘* 혹은 엘*(엘로와흐*)
the Lord thy God: 주* 너의 엘로힘*(뤀 4:8)
Lord God: 주* 엘로힘*
Lord God of Israel: 이스라엘*의 주* 엘로힘*
God forbid: 엘로힘*께서 금하소서.
God save the king: 엘로힘*께서 왕을 구하소서(삼첫 10;24; 삼둘 16:16; 왕첫 1:25,34,39; 왕둘 11:12; 연둘 23:11)
God do so and more also to me: 엘로힘*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삼첫 3:17; 14:44; 25:22; 삼둘 3:9,35; 19:13; 왕첫 2:23; 왕둘 6:31)
god(s): 엘로힘, 엘로힘들
goddess: 여자 엘로힘(왕첫 11:5,33; 활 19:27,35,37): 비블로스에 5구절, 5회 사용됨.
Godhead: 엘로힘*격(활 17:29; 롬 1:20; 콜 2:9), 권위역에는 소문자로 시작하는 godhead는 없음.
to God-ward: 엘로힘*을 향하여(향한)(코둘 3:4; 살첫 1:8), 엘로힘* 편에 서서(탈 18:19): 권위역에서 to God-ward의 형태로 3회 사용되며, 소문자로 시작하는 god-ward는 없음.
[어원]
Hb. Elohim(El) < Gr. Deos < L. Deus < En. God
[사용횟수]
겐 1:1부터 계 22:19까지 4070구절, 4725회 사용됨.
[단어해설]
창조주의 이름에는 신비가 있다. 이름에는 정체성 식별이라는 대표적 기능 외에도 전하고자 하는 고유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 가령 아담(Adam)이라는 이름은 원래 인간, 인류를 지칭하는 보통명사인데도 고유명사화되어 일 개인을 가리키게 되었고, 또 그 이름에는 진흙이라는 메시지가 들어 있다. 창조주의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아담이란 이름은 창조주의 이름의 닮은꼴인지도 모른다.
전 세계 모든 민족들은 각자 자기 언어로 창조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이스라엘인들은 엘로힘*(Elohim)이라 부르고, 그리스인들은 데오스*(Theos)라 부르며, 로마인들은 데우스*(Deus)라 부르고, 이집트인들은 라*(Ra), 이슬람권 사람들은 알라*(Allah), 그리고 영어권에서는 갓*(God)이라 부른다.
동양권에서는 한자로 신(神) 혹은 상제(上帝)라 부르고, 일본은 가미라 부르며, 한국에서는 하나님 혹은 하느님이라 부른다.
이렇게 된 것은 바벨탑 사건의 언어혼잡에 따른 결과이기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단지 언어차이만으로 정당화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각 민족마다 자기 언어로 창조주의 이름을 지어서 부르도록 내버려 두신 것 같지만, 거기에는 분명 시험의 과정이 존재하고 있다.
언어혼잡 이후 언어회복의 과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블로스를 통한 언어회복 과정에서 각 민족마다 비블로스 말씀을 살펴 지키는지 여부에 따라 민족의 운명이 결정되는 일련의 시험과정이 있어왔다. 비블로스를 통한 언어회복의 과정에서 창조주의 이름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가령 한민족의 경우 하나님, 하느님 논쟁에서 하느님이 승리하였는데, 문제는 하느님의 어원인 하늘님이 인내천 사상의 무속신앙에서 비롯되었다는 데 있다. 단군 같은 사람을 천신으로 숭배하는 무속신앙의 결과물이 하느님인데, 창조주를 하느님으로 부르는 것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지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한다.
이슬람권의 알라*(Allah) 역시 문제가 있다. 그들은 알라 외에는 다 우상숭배라 주장하는데, 반대로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오히려 알라가 우상숭배라 주장한다. 둘 중에 하나는 진짜이고 하나는 가짜인 셈이다.
영어의 갓*(God)도 어원적으로는 아리안족의 무속신앙인 초혼행위(to invoke)와 제사행위(to pour)에 기원한다고 옥스퍼드영영사전(OED)은 밝히고 있다. 중국의 신(神), 일본의 가미, 이집트의 라(Ra)와 기타 다른 민족들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이스라엘의 경우는 다르다. 언어혼잡 이후 언어회복의 첫 단추가 히브리어 비블로스였고, 비블로스가 증거하는 창조주의 정확한 이름은 엘* 혹은 엘로힘*임이 확인되고 있다. 연대기들의 둘째 비블로스(역대하) 7장 14절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을 소개하고 있다. 심지어 이스라엘의 이름 속에 아예 창조주의 이름인 엘*을 넣어주셨다.
우리 주* 예수스*께서도 십자가 상에서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실 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심으로, 히브리어 엘*이 정확한 이름임을 상기시켜 주셨다(맛 27:46).
비블로스가 진리라면, 창조주의 이름의 진실은 엘* 혹은 엘로힘*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엘*은 객관적인 이름이고, 엘로힘*은 인간을 통해서 말씀을 성취하시는 엘*의 주관적인 이름으로서, 아버지*와 아들*과 거룩하신* 숨*을 동시에 지칭하기에, 히브리어 쌍수형으로 엘로힘*이라 표기한다. 비블로스가 말씀성취의 책이므로 대부분 엘로힘*이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영어 제임스 왕 역본(KJV) 비블로스의 경우 정확한 본문에 치중하느라 창조주의 이름은 간과한 듯 보이지만, 이제는 언어회복의 시간이 무르익었기에 한글 안티오키아 비블로스에 와서 비로소 창조주의 이름을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비블로스가 진리임을 믿을진대, 첫 단추인 히브리어 비블로스에서 창조주의 정확한 이름이 복원되었고, 언어회복의 막바지에 한글 안티오키아 비블로스를 통해서 그 정확한 이름을 되살린 것은 의미가 깊다 하겠다. 비블로스의 진리대로라면, 훗날 언어가 하나로 회복되었을 때에도 창조주의 이름은 엘로힘*이 될 것이다.
시간이 무르익었기에 이제부터 전 세계 모든 민족들, 특히 크리스토스의 사람들은 창조주의 정확한 이름을 부르기 시작해야 한다. 창조주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그분의 이름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나타날 것이며, 엘로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은 마침내 한 백성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을 통해 계시된 창조주의 이름은 비단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새 피조물이 된 크리스토스의 사람들은 모두 엘로힘*의 이스라엘*이라고 비블로스의 진리가 말씀하고 있다. 갈라티아*인들에게 보내는 사도 파울로스*의 서신 6장 15,16절:
"크리스토스* 예수스*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소용이 없고, 오직 새 피조물뿐입니다. 이 기준에 따라서 걷는 자마다, 그들 위에 평화와, 은총이 있으니, 곧 엘로힘*의 이스라엘* 위에 있습니다."
창조주의 이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엘로힘*(Elohiym, h430): 인간과의 관계에서 인간을 통해 말씀을 성취하시는 전능자 엘*로서 히브리어 쌍수형으로 표기됨.
엘*(El, h410):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주권을 가지신 절대자이심을 나타내는 이름으로서 단수형으로 표기됨.
엘로와흐*(Elowahh, h433)는 엘*의 연장형(혹은 강조형): 엘로아흐*(Eloahh)는 엘로와흐*의 단축형으로 비블로스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음. 엘* = 엘로와흐* = 엘로아흐*: 모두 단수형.
엘라흐*(Elahh, h426)는 엘로와흐*(h433)의 아람어 표기.
창조주는 대문자 표기로 나타내며, 한글에는 대소문자 구분이 없으므로 * 표기로 대문자 표기를 대신한다.
대문자 없이 엘로힘이라 표기하면,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로서의 엘로힘을 가리킨다. 엘로힘*의 말씀이 온 자들인 크리스토스의 사람들이 결국 엘로힘들이 될 것이며, 그 외에 이 세상 신들은 다 가짜 엘로힘들일 뿐이다.
참고로 영어 제임스 왕 역본에서 단어 전체가 대문자로 표기된 GOD은 LORD와 마찬가지로 엘로힘*의 이름인 YHWH(예호바, Jehovah)를 영역한 독특한 표기이다(겐 6:5).
예호바*(Yehovah, h3068)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이름인데, 이스라엘에게는 예표적으로 계시하셨다가, 인류 전체를 위하여 그리스어(헬라어) 예수스(Jesus)라는 이름으로 온전히 계시하셨다. 예호바*라는 단어의 어의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영원하신 분이라는 의미인데, 원래 히브리어 하야(hayah, h1961)에서 파생된 단어다. 영어 be 동사와 같은 개념으로서 숨쉬는 존재(to breathe, to be) 혹은 성취(come to pass)의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야(흐)*(Yahh, h3050)는 예호바*(h3068)의 축약형으로서 의미는 동일하다. 영어로 Jah로 번역되기도 하고, 인간의 이름과 결합된 이름으로서 -iah, jah 등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비블로스 전체에서 엘*과 엘로힘*의 용례를 총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엘로힘*(GOD, God, 겐 1:1부터 계 22:19까지 3502구절, 3970회 사용),
엘로힘*의(God's, 겐 28:22부터 펱첫 5:3까지 22구절, 23회 사용),
엘*(GOD, God, 겐 14:18부터 계 2:18까지 277구절, 285회 사용),
엘*의(God's, 욥 33:6; 35:2, 2회 사용),
엘로와흐*(God, 다 32:15부터 합 3:3까지 52구절, 52회 사용),
엘로와흐*의(God's, 욥 36:2, 1회 사용),
엘라흐*(God, 라 4:24부터 단 6:26까지 67구절, 79회 사용),
엘로힘*들(Gods, 삼첫 4:8, 2회 사용),
엘로힘(god, 탈 7:1부터 코둘 4:4까지 31구절, 35회 사용),
엘로힘들(gods, 겐 3:5부터 갈 4:8까지 199구절, 226회 사용),
엘(god, 탈 34:14; 다 32:12; 심 9:46; 시 44:20; 81:9; 사 43:12; 44:10,15,17; 45:20; 46:6; 단 11:36; 말 2:11에서 13구절, 15회 사용),
엘들(gods, 탈 15:11; 단 11:36, 2회 사용),
엘로와흐(god, 연둘 32:15; 단 11:37,38,39; 합 1:11, 5회 사용),
엘라흐(god, 단 3:28; 4:8, 2회 사용),
엘라흐들(gods, 렘 10:11; 단 2:11,47; 3:12,14,18; 4:8,9,18; 5:4,11,14,23에서 13구절, 14회 사용)
[단어비교]
God, GOD, Lord, LORD
[활용]
godliness, ungodly, ungodliness
[의미]
엘로힘다운, 엘로힘답게(팀둘 3:12; 팉 2:12)
godliness: 엘로힘다움(팀첫 2:2,10; 4:7,8; 6:3,5,6,11; 펱둘 3:11)
the godly: 엘로힘다운 자들(펱둘 2:9)
the ungodly: 엘로힘답지 않은 자들(롬 4:5; 5:6; 팀첫 1:9; 펱둘 2:5)
ungodliness: 엘로힘답지 않음(롬 1:18; 11:26; 팀둘 2:16; 팉 2:12)
[어원]
< OE god, god + ly(엘로힘 + 다운): 엘로힘다운이란 뜻.
[사용횟수]
삼둘 22:5부터 유 1:18까지 57구절, 61회 사용됨.
[단어해설]
영어 godly를 ‘경건한’으로 번역하는 것은 크나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블로스에서 의미하는 '위대한 신비'를 가려버리기 때문이다(딤전 3:16).
이 말씀에서 위대한 신비란 엘로힘*께서 성육신 사건을 통해서 인간들을 엘로힘들로 완성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엘로힘*의 말씀이 온 자들을 엘로힘들이라 부르셨고, 이러한 말씀성취는 깨뜨릴 수 없는 것이라 했다(요 10:35).
엘로힘*이신 예수스* 크리스토스*의 성육신 사건이야말로 말씀성취를 통해서 인간들을 엘로힘들이 되게 하시려는 창조주의 위대한 신비이며, 이 신비를 담은 단어가 바로 godly(godliness)인 것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한글로 '엘로힘다운(엘로힘다움)'으로 번역해야 신비의 알멩이를 놓치지 않게 된다. 여기서 godly는 [god(엘로힘) + ly(like, 다운, 답게)]로 구성되므로 '엘로힘다운(답게)'이라 번역하였다. 명사형인 godliness는 '엘로힘다움'이라 하면 된다.
즉, 엘로힘*께서 말씀성취를 통해 성육신하여 인간이 되신 것처럼, 인간들도 말씀성취를 통해 엘로힘들이 될 수 있는데,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구원(salvation)이고, 새로남(born again, 거듭남)인 것이다.
엘로힘*의 생명으로 새로난 엘로힘들은 혼의 변화과정을 통해서 현 세상에서 엘로힘다운(godly) 삶의 열매들을 증거하게 되며, 그것이 빛과 소금의 바른 의미이기도 하다.
이것을 '경건한(경건)'으로 번역하게 되면, 이같은 위대한 엘로힘다움의 신비를 가려버리는 결과가 될 뿐 아니라, 단지 아담의 생명으로 두려워하고 삼간다는 의미로 전락하여, 알멩이 없는 껍데기만 남게 된다.
'경건한'을 의미하는 단어는 따로 있는데, 영어 devout가 그것이다. 실제로 비블로스에서도 이 단어가 '경건한'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뤀 2:25; 활 2:5; 8:2; 10:2,7; 13:50; 17:4,17; 22:12).
[단어비교]
용례 비교연구
godly man: 엘로힘다운 사람(시 12:1),
the ungodly: 엘로힘답지 않은 자들(롬 4:5; 5:6; 11:26; 팀첫 1:9; 펱둘 2:5),
ungodliness: 엘로힘답지 않음(롬 1:18; 11:26; 팀둘 2:16; 팉 2:12),
godly seed: 엘로힘다운 씨(말 2:15);
godly sincerity: 엘로힘다운 신실함(코둘 1:12);
after godly manner: 엘로힘다운 방식대로(코둘 7:9);
godly sorrow: 엘로힘다운 근심(코둘 7:10);
after godly sort: 엘로힘다운 방식에 따라(코둘 7:11; 요셋 1:6);
godly jealousy: 엘로힘다운 질투(코둘 11:2);
godly edifying: 엘로힘답게 세워주기(팀첫 1:4);
godly fear: 엘로힘다운 두려움(히 12:28);
the mystery of godliness: 엘로힘다움의 신비(팀첫 3:16);
a form of godliness: 엘로힘다움의 모양(팀둘 3:5)
[활용]
gospel's
[의미]
희소식(기쁘고 반가운 소식)
[어원]
<OE godspel < god, good + spell, news, story: 동계어 good, spell
[사용횟수]
맛 4:23부터 계 14:6까지 98구절, 104회 사용됨.
[단어해설]
비블로스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정확히 번역하는 것은 영광스러운 말씀성취의 첫단추가 된다.
인간 한계의 막다른 골목에서 대반전의 메시지를 듣게 되는데,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로부터 온 놀라운 소식이다. 전쟁의 승리, 해방과 자유, 자녀 출산 등과 같은 예전의 희소식들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완벽하고 영원한 희소식이다.
이것을 그리스어(헬라어)로 유앙겔리온(euangelion)이라 하는데, 하늘의 천사가 전해준 선한 메시지(a good message) 혹은 반가운 소식들(glad tidings)을 뜻한다.
영어로 gospel(가스펠)이라 번역한 것은, 인간의 질문에 대한 엘로힘*(God)의 정답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글로 '복음'이란 번역한 것은, 하늘로부터 온 복된 음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의역이 지나친데다가 자칫 기복신앙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어 바람직하지 않다. 차라리 문자 그대로 '희소식'이라 직역하는 것이 본래의 취지를 살린 정확한 번역이라 하겠다.
무엇보다도 희소식 개념이 인간의 본능과 직결된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생존본능은 그 자체에 그치지 않고 생존 그 이상을 추구하는 또 다른 본능을 가리키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의 기대심리와 보상심리를 나타내는 희소식 본능인 것이다.
비블로스의 희소식 용례를 살펴보면, 엘로힘*의 왕국이 손앞에 있다는 왕국의 희소식, 예수스* 크리스토스*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의 희소식, 회개하고 그분을 믿는 자마다 엘로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주셨다는 희소식을 들 수 있다.
현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먼저 희소식이 선포되고, 또한 온 세상에 희소식이 선포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네 권의 희소식의 책이 든든한 초석을 이루고, 희소식을 이방인들에게 골고루 분배하는 사역을 위해 따로 부르심을 받은 사도 파울로스*의 메시지들이 빛을 발하며, 마지막으로 영존하는 희소식(the everlasting gospel)이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단어비교]
gospel: 희소식
evangelist(s): 희소식 전도자(들)
[활용]
[의미]
헬(지옥), 지하세계
hell fire: 헬의 불(맛 5:22; 18:9; 맠 9:47)
[어원]
<OE hel, hell, OTeut. halja, the coverer up or hider<HELE In ON. also the proper name of the goddess of the infernal regions.
[사용횟수]
다 32:22부터 계 20:14까지 54구절, 54회 사용됨.
[단어해설]
인생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간의 본능 속에 내재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입증해 준다.
전 세계 어디를 가나 죽음 이후에 대한 관심과 두려움이 인류의 보편적 반응으로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비슷비슷하나 정확한 지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공통점 때문에 답을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비블로스가 과연 진리라면 여기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먼저 한글로 ‘지옥’이라는 표현에 문제가 없는지부터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지옥’(地獄)이란 단어는 땅의 감옥이란 개념인데, 영어의 ‘헬’(hell)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헬은 지옥보다 광범위한 개념으로서, 헬이 곧 지옥인 것은 아니다. 차라리 지하세계로 표현하는 것이 보다 가깝다 하겠다. 이 경우는 영어 헬(hell)을 한글로 음역하여 한글로도 그냥 '헬'이라 표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스올과 하데스는 무덤과 헬을 넘나든다. 음부라는 번역은 적절치 않다. 무덤이든지 헬이든지 둘 중 하나다. 음부나 연옥 같은 개념은 차라리 헬의 개념 속에 포함된다. 이를테면, 지옥이든 음부든 연옥이든 다 헬의 개념 내에 있다 하겠다. 그만큼 헬의 개념은 광범위하다.
문제는 헬을 물질적으로 설명하려 드는 잘못된 시도들이다. 가령 지구의 땅 속 깊숙이에 헬이 있다는 주장 등은 헬의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한 것이다.
아브라함의 품과 헬 사이에 고정된 걸프가 있다는 비블로스의 증거를 유의할 필요가 있다. 헬이 땅속 어디라면, 어떻게 아브라함의 품과 걸프 하나로 양립시킬 수 있겠는가. 아브라함의 품은 파라다이스 개념이고, 그것은 하늘에 있는 영역이라 이해할 수 있다. 그 자체가 영의 세계이지 물질세계가 아니다. 그렇다면 헬 역시 영의 세계이지 물질세계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헬을 지구의 깊숙한 곳으로 주장하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넌센스이다. 헬은 영의 세계이지 물질세계가 아니다. 땅 아래란 땅속과는 다르다. 땅 아래는 물질세계가 아닌 영의 세계의 입구이다.
하늘들도 둘째 하늘까지가 물질세계다. 낙원(파라다이스)은 셋째 하늘에 속하며, 영의 세계이다. 낙원과 헬 사이에는 넘어갈 수 없는 경계가 있고, 고정되어 결코 움직일 수 없는 만(걸프)이 있다. engulf는 심연(아비소스)과 맞닿아 있다.
히브리어 스올과 그리스어 하데스는 전후문맥과 용례에 따라서 물질세계인지 영의 세계인지에 따라 무덤과 헬로 구분하여 번역할 필요가 있다.
음부라는 번역은 심각한 오역이며, 연옥설을 정당화하는 그릇된 근거를 제공한다. 연옥은 일종의 음부 개념이기 때문이다. 음역하여 스올(sheol) 혹은 하데스(hades)라 번역하는 것은 무책임한 번역이며, 음부로 번역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사후세계에 대한 입장은 진리의 입장과 비진리의 입장으로 나뉜다. 이교도들이 사후세계에 대한 수많은 주장들과 교리들을 내놓았지만, 진리의 입장이 아니며, 오히려 모조품과 유사품과 사이비 교리에 지나지 않는다.
[단어비교]
[활용]
[의미]
숨주입(욥 32:8; 딤후 3:16),
욥 32:8: 그러나 사람 안에는 영이 있으며: 전능자*의 숨주입이 사람들에게 이해력을 주십니다.
딤후 3:16: 비블로스*기록 전체는 엘로힘*의 숨주입에 의하여 주어졌고, 교리를 위하여, 책망을 위하여, 교정을 위하여, 의 안의 교육을 위하여, 유익하니:
[어원]
< L in in, into + spire < spirare breathe; 동계어 aspire, expire, respire
[사용횟수]
욥 32:8과 팀둘 3:16에 2구절, 2회 사용됨.
[단어해설]
비블로스에 단 두 번 나오는 이 단어는 비블로스의 생명줄과도 같다. 비블로스의 모든 단어들은 숨주입 없이는 무용지물이다. 마치 바람 빠진 타이어가 무용지물이듯이 말이다.
이토록 중요한 단어를 대부분의 성경들은 ‘영감’(靈感)으로 번역하였고, 그 결과 성경의 기초가 영감이 되었으며, 기독교의 기초 역시 영감이 되었다. 결국 영감의 기초가 무너지면 성경도 무너지고 기독교도 무너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영감의 의미는, 창조주의 영*께서 계시하셨기에 인간의 혼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뜻이다. 오로지 창조주의 영*의 감동만이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비블로스(성경)는 최초의 계시로 된 최초의 원본만이 영감된 것이고, 모든 역본들과 번역본들은 영감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문제는 현재 지구상에 최초의 원본인 비블로스 전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따라서 현존하는 모든 역본들과 번역본들은 영감된 것이 아니기에 완전하지 못하고, 그 결과 학자들의 비평을 거친 비평본문만이 신뢰할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오늘날 모든 성경논쟁이 답을 찾지 못하는 근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상 성경의 기초, 기독교의 기초를 인본주의 비평학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기막힌 현실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하지만 이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따로 있다는 사실이다.
욥기 32장 8절의 ‘inspiration’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네샤마(neshamah)는 ‘숨을 훅 불어넣기’를 뜻한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의 ‘inspiration of God’에 해당되는 그리스어 데오프뉴스토스(theopneustos)는 ‘엘로힘*의 숨을 불어 넣는다’, 혹은 ‘엘로힘*의 숨을 주입시킨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놀랍게도 인간의 ‘숨’에는 ‘영’만 있지 않고 ‘영’과 ‘혼’이 함께 들어 있다. 비블로스가 창조주의 ‘영’뿐 아니라 ‘혼’이 개입된 ‘숨 넣으심’ 혹은 ‘숨입’에 의해 주어졌다는 사실은 비블로스가 창조주의 ‘영’과 인간의 ‘혼’의 합작품임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창조주의 ‘숨’은 인간의 ‘숨’과 함께 숨쉬기 때문이다. 창조주께서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셔서 인간이 산 혼이 되었고, 인간의 숨에는 영뿐 아니라 혼이 들어가 있다. 따라서 창조주의 숨은 인간의 숨과 함께 호흡하게 되어 있으며, 그것이 딤전 3:16이 의미하는 엘로힘다움의 신비인 것이다.
실제로 비블로스를 기록한 언어는 인간의 언어이고, 인간의 언어는 인간의 혼에 속하기에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창조주의 영은 완전하기에 그분의 계시 또한 완전하다. 불완전한 인간의 언어에 완전한 영의 계시가 담겨 있는 것이 바로 비블로스인 것이며, 이것이 엘로힘다움의 신비이다.
비블로스(성경)의 기초는 영이 아닌 숨이며, 기독교의 기초 역시 영이 아닌 숨이다. 영감설의 기초는 숨주입의 기초로 대체되어야 마땅하다.
완전한 영의 계시와 불완전한 인간의 언어가 하나로 결합된 엘로힘다움의 신비가 바로 비블로스이며, 따라서 비블로스를 기록한 인간의 언어가 아무리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거기에 담긴 계시의 말씀들은 완전하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비블로스 안에 있는 숨과 크리스토스 사람들 안에 있는 숨은 동질의 숨이다. 따라서 크리스토스 사람들은 비블로스의 숨과 함께 숨 쉴 수 있다. 그렇게 함께 숨 쉬면서 비블로스의 모든 단어들이 정확무오하다는 사실을 얼마든지 검증하며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비블로스의 숨과 같은 숨을 갖지 못한 모든 인본주의 학자들은 비블로스를 비평할 자격이 없다. 그들은 비블로스를 이해할 수도 없고 분별할 능력도 없다. 따라서 그들이 만들어낸 모든 성경들은 완전한 계시를 담지 못하였고, 정확성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기에 결코 비블로스(성경)로 인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모든 문제들의 근본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숨주입의 핵심 중 하나인 인간의 혼의 개입을 바르게 이해해야 비블로스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비블로스를 기록한 인간의 언어는 그 자체가 불완전하지만 완전한 계시를 담을 수 있기에 신비롭다.
무엇보다도 언어회복의 관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혼에 속한 인간의 언어는 혼잡과 회복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어혼잡에서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 히브리어 비블로스였고, 그리스어 비블로스였으며, 그 후 라틴어 비블로스와 영어 비블로스를 거쳐 한글 비블로스까지 왔다.
결국 비블로스의 언어는 원래의 하나의 언어로 회복될 것이다. 우리는 언어회복의 끝 부분에 다다른 시대에 살고 있기에 비블로스를 언어회복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고, 모든 것들을 언어회복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이 엘로힘다움의 신비를 이해하는 이 시대의 비결이다.
이제부터는 비블로스에서 영감이란 번역을 폐기해야 하며, 숨주입으로 대체해야 마땅하다. ‘영입’(靈入) 역시 혼이 빠진 개념이므로 정확한 번역이 될 수 없다.
Holy Ghost(거룩하신* 숨*)가 의미하듯이 거룩하신* 숨*의 숨과 동질의 숨으로 호흡하는 사람들만이 엘로힘다움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다.
진정한 밥티스마를 통해서 착한 엘성(선한 양심)으로 응답하는 크리스토스의 사람들만이 거룩하신* 숨*과 동질의 숨으로 호흡하며 그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그 숨결을 모르는 사람은 비블로스의 진실을 알 수 없다.
[단어비교]
inspiration / understanding
[활용]
leavened, leaveneth
[의미]
뜸씨(탈 12:15; 34:25; 렙 2:11; 6;17; 10:12; 23:17; 암 4:5; 마 13:33; 16:6,11,12; 맠 8:15; 코첫 5:6,7,8; 갈 5:9)
뜸씨 있는(탈 12:15; 13:3,7; 23:18; 7:13; 다 16:3,4)
발효시키다(탈 12:34,39)
뜸씨에 의해 뜨다(맛 13:33; 뤀 13:21; 코첫 5:6; 갈 5:9)
old leaven: 옛 뜸씨(코첫 5:7,8)
a little leaven: 작은 뜸씨(코첫 5:6; 갈 5:9)
unleavened: 뜸씨 없는(겐 19:3부터 코첫 5:8까지 50구절, 61회 사용됨.)
unleavened bread: 뜸씨 없는 빵(겐 19:3부터 코첫 5:8까지 39구절, 43회 사용됨.)
unleavened: 뜸씨 없는(겐 19:3부터 코첫 5:8까지 47구절, 58회 사용), 뜸씨 없이(탈 29:2; 숫 6:15), 뜸씨에 의해 뜨지 않은(코첫 5:7)
unleavened cake(s): 뜸씨 없는 케이크(들)(탈 12:39부터 연첫 23:29까지 11구절, 12회 사용)
unleavened wafer(s): 뜸씨 없는 웨이퍼(들)(탈 29:2; 렙 2:4; 7:12; 숫 6:19의 4구절, 4회 사용)
[어원]
F levain < L levamen, means of raising < levare, raise 높게 하다, 부풀리다 < levis, light, 가벼운
[사용횟수]
겐 19:3부터 갈 5:9까지 72구절, 100회 사용
[단어해설]
leaven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세오르(se`or)와 그리스어 zume(주메)는 작은 것으로서 다른 것에 영향을 주어 전체를 변질시키는 어떤 것을 말한다. 영어 leaven은 라틴어 lavere(일으키다), levamen(일어나는 것)을 거쳐 파생된 단어로서, 그 뜻은 “부풀리게 하는 것”, 혹은 “뜨게 하는 것”이다. 비슷한 의미의 fermentation(발효), yeast(효모) 등의 단어는 leaven보다 후기에 사용되다가 나중엔 leaven을 대체하여 널리 사용되었으며, enzyme(효소) 같은 단어는 19세기 이후 현대과학의 발달과 함께 생화학적 용어로 자리잡으면서, 다른 단어들과 병용되어 사용되었다.
비블로스에서 leaven은 대부분 빵 제조와 관련되어 사용되었으며, 빵을 부풀게 하는 작용과 빠른 속도로 퍼지는 성질로 특징 지워진다. 빵, 케이크, 웨이퍼 외에, 비블로스에서 포도주에 직접적으로 leaven을 넣지 말라는 말씀은 없다. 다만 희생의 피를 뜸씨를 넣은 빵과 함께 드리지 말라는 말씀이 있을 뿐이다(탈 23:18; 34:25). 더욱이 포도주의 경우, 이미 포도 자체에 뜸씨가 들어 있기에, 뜸씨 없는 포도주란 그 당시엔 아예 있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단지 발효가 적게 되었는가 많이 되었는가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발효가 매우 적게 된 포도주는 일상 식사 때의 음료로 사용되었고, 발효가 아주 많이 된 독주는 비블로스에서 명백히 금하고 있다.
그러나 빵과 leaven에 대한 비블로스의 말씀들은 영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빵이 일용할 양식으로서 생명의 말씀을 상징한다면, leaven은 말씀에 침투하여 급속히 퍼져서 말씀 전체를 부풀리거나 변질시키는 대단히 위험한 요소이기에, 가장 큰 경계의 대상이 된다. 특히, 말씀의 순수성과 거룩성이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하였기에, 그 어떤 경우라도 현 세상의 요소와 오는 세상의 요소가 혼합되는 것이나, 첫 창조에 속한 요소가 새 창조에 속한 요소에 영향을 미치는 것 자체를 엄히 금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비블로스에서 unleavened bread를 엄격히 요구한 것은, 이집트 탈출 시 지체하지 않고 신속히 탈출한 것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도 있고(탈 12:39), 또 변질과 혼합을 엄중히 경계하는 의미도 있다. 이 같은 영적 의미만 아니라면, 우리의 일상생활에 여러 가지 유익한 용도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 leaven이 굳이 부정적 의미로만 쓰여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렙 7:13; 23:17).
leaven의 비블로스적 용례가 주로 빵 제조에 국한되어 사용되기에, 일단 술 제조용으로 알려진 ‘누룩’으로 번역하는 것은 비블로스의 용례에 부적합하다 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비블로스가 leaven으로써 경계하고 금한 것은 술에 대한 것이 아니라, 빵에 대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누룩은 그 자체가 발효소가 아니라, 발효된 밀가루 덩어리이므로, 단지 발효소를 지칭하고 있는 leaven과 동일시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블로스에서 leaven은 ‘발효시키다’란 동사 외에 명사로 쓰일 때는 ‘발효소’를 말하며, 주로 빵 제조에 관련된 효소를 가리키기 때문에, 오늘날의 이스트(yeast)나 베이킹 파우더에 해당된다 할 수 있다. 현대과학의 발달과 함께 등장한 효소(enzyme)라는 단어가 비록 생화학적 개념이긴 하지만 leaven과 개념도 같고, 실생활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다는 실용성의 측면에서도 상호 일치한다. 효소의 순수 우리말이 ‘뜸씨’이기 때문에, leaven을 ‘뜸씨’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뜸씨와 유사한 뜸팡이나 효모는 효소제가 아니라 균류이기 때문에 적합치 않다. 균류는 실생활에서 사용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뜸팡이를 말려 가루로 만든 뜸팡잇가루는 비타민 B 약제나 소화제 등으로 쓰인다. 오히려 뜸팡이 속에 들어있는 니마제라는 뜸씨가 실생활에서 효소제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비블로스에서 빵 제조에 쓰이는 효소로 사용된 leaven은 우리말로 ‘뜸씨’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오늘날의 이스트(yeast)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긴 하지만, 비블로스 용어로서는 ‘뜸씨’가 더 적합하다 하겠다.
[단어비교]
leaven, yeast, enzyme, malt
[활용]
LORD, LORD's, LORDS, Lord, Lord's, lord's, lords, lordly, lordship
[의미]
LORD: *주*; Lord: 주*; lord: 주, 주인, 주인님(맛 18:26; 25:20,22,24; 뤀 13:8; 14:22), 주님(겐 42:10; 44:18), 영주(사 16:8), 귀족(왕둘 7:17), 지배자(사 19:4)
the Lord thy God: 주 너의 엘로힘*(뤀 4:8)
lordly: 귀한(심 5:25: 비블로스에 한 곳뿐)
lordship: 주인된 권리(= dominion, 맠 10:42; 뤀 22:25)
be lord over: 군림하다(펱첫 5:3)
Thus saith the LORD: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탈 4:22; 5:1; 7:17; 8:1,20; 9:1,13; 10:3; 11:4; 32:27; 슈 7:13; 24:2; 심 6:8; 삼첫 2:27; 10:18; 15:2; 삼둘 7:5,8; 12:7,11; 24:12; 왕첫 11:31; 12:24; 13:2,21; 14:7; 17:14; 20:13,14,28,42; 21:19; 22:11; 왕둘 1:4,6,16; 2:21; 3:16,17; 4:43; 7:1; 9:3,6,12; 19:6,20,32; 20:1,5; 21:12; 22:15,16,18; 연첫 17:4,7; 21:10,11; 연둘 11:4; 12:5; 18:10; 20:15; 21:12; 34:23,24,26; 사 7:7; 10:24; 22:15; 28:16; 29:22; 30:15; 37:6,21; 38:1,5; 42:5; 43:1,14,16; 44:2,6,24; 45:1,11,14,18; 48:17; 49:7,8,22,25; 50:1; 51:22; 52:3,4; 56:1,4; 65:8,13; 66:1,12; 렘 2:2,5; 4:3; 5:14; 6:9,16,21,22; 7:3,20,21; 8:4; 9:7,15,17,22,23; 10:2,18; 11:3,11,21,22; 12:14; 13:1,9,12,13; 14:10,15; 15:2,19; 16:3,5,9; 17:5,21; 18:11,13; 19:1,3,11,15; 20:4; 21:4,8,12; 22:1,3,6,11,18,30; 23:2,15,16,38; 24:5,8; 25:8,15,27,28,32; 26:2,4,18; 27:2,4,16,19,21; 28:11,13,14,16; 29:4,8,10,16,17,21,31,32; 30:5,12,18; 31:2,7,15,16,23,35,37; 32:3,14,15,28,36,42; 33:2,4,10,12,17,20,25; 34:2,4,13,17; 35:13,17,18,19; 36:29,30; 37:7,9; 38:2,3,17; 39:16; 42:9,15,18; 43:10; 44:2,7,11,25,30; 45:2,4; 47:2; 48:1,40; 49:1,7,12,28,35; 50:18,33; 51:1,33,36,58; 켈 2:4; 3:11,27; 5:5,7,8; 6:3,11; 7:2,5; 11:5,7,16,17; 12:10,19,23,28; 13:3,8,13,18,20; 14:4,6,21; 15:6; 16:3,36,59; 17:3,9,19,22; 20:3,5,27,30,39,47; 21:3,9,24,26,28; 22:3,19,28; 23:22,28,32,35,46; 24:3,6,9,21; 25:3,6,8,12,13,15,16; 26:3,7,15,19; 27:3; 28:2,6,12,22,25; 29:3,8,13,19; 30:2,6,10,13,22; 31:10,15; 32:3,11; 33:25,27; 34:2,10,11,17,20; 35:3,14; 36:2,3,4,5,6,7,13,22,33,37; 37:5,9,12,19,21; 38:3,10,14,17; 39:1,17,25; 43:18; 44:6,9; 45:9,18; 46:1,16; 47:13; 암 1:3,6,9,11,13; 2:1,4,6; 3:11,12; 5:3,4,16; 7:17; 옵 1:1; 미 2:3; 3:5; 나 1:12; 학 1:5; 2:6,11; 쪀 1:3,4,14,16,17; 2:8; 3:7; 8:2,3,4,6,7,9,14,19,20,23; 11:4; 말 1:4)
[어원]
{< Sax. hlaford = hlaf, loaf + ford, to give} or
{< ME loverd, laverd < OE hlaford = hlaf, bread + weord, guardian: 동계어: lady, loaf}
[사용횟수]
겐 2:4부터 계 22:21까지 6782구절, 8015회 사용됨. 이 중 OT가 7279회, NT가 736회 사용되었다.
[단어해설]
비블로스에서 8,000 여 단어가 사용될 정도로 대단히 중요한 단어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지배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사용되지만, 주로는 창조주 엘로힘*을 이 단어로 지칭하고 있기에 더욱 중요하다. 이 단어의 용례는 크게 OT의 히브리어 용법과 NT의 그리스어 용법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히브리어 아돈(adon) 혹은 아도나이(adonay)는 기본적으로 ‘주’(lord), ‘지도자’(master)를 뜻하며 겐 15:2; 탈 23:17; 시 8:1; 68:17; 86:3; 사 29:13; 40:10 등에서 사용되었다. 절대자(sovereign), 조정자(controller)를 뜻하는 이 아도나이란 단어는 유사한 뜻으로 점유자(possessor), 소유주(owner) 등을 뜻하는 바알(baal)이란 단어와는 엄격히 구분하여 사용되었다. 다 10:17에서는 아돈(adown)의 강세형으로서의 아도나이(adonay)가 ‘주 중의 주’(Lord<adonay> of lords<adown>)라는 표현으로 쓰였으며, 겐 24:9; 45:8에서는 이 단어가 사람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왕첫 16:24은 권위역에서 이 단어를 소유자(owner)로 번역한 유일한 구절이기도 하다.
주목할만한 것은 히브리어 예호바(YEHOVAH)란 단어로서 비블로스에서 무려 6828회나 사용되었다. 원래 이 단어는 모음이 없이 자음 네 자로만 표기되는 ‘4자음문자’(TETRAGRAMMATON)로서 YHWH(요드헤바우헤)로 표기한다. 히브리 민족은 엘로힘*의 이름을 인간이 함부로 부를 수 없는 거룩한 이름이라 하여, 비블로스에 기록된 그분의 이름을 눈으로만 확인하고 정작 부를 때는 아도나이(adonay)의 모음부호를 YHWH에 넣어서 예호바(YEHOVAH)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그 발음에 대하여는 예호바(JEHOVAH, YEHOVAH)란 주장과 야훼(JAHWEH, YAHWEH)란 주장이 있으나(한글 비블로스는 여호와), 영어의 권위역에 따라 예호바(JEHOVAH)로 발음함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권위역 비블로스는 히브리어 비블로스의 용례를 그대로 살려서, ‘예호바’(YHWH)와 ‘아도나이’(ADONAY)를 각각 ‘LORD’(몇 군데는 GOD)와 ‘Lord’로 구분하여 표기하였다. 즉, ‘YHWH’가 눈으로만 읽을 수 있고, 발음은 아도나이의 발음을 빌어 ‘예호바’로 부르듯이, ‘LORD’도 눈으로만 ‘Lord’와 식별되게 하되, 발음은 ‘Lord’와 같게 한 것이다.
‘YHWH’가 처음 등장한 곳은 겐 2:4이며, 이로써 그 이름을 아담이 이미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겐 4:26에 의하면 셋의 아들 에노스 때부터는 사람들이 이 ‘YHWH’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겐 12:8에 보면 아브라함도 분명 이 ‘YHWH’의 이름을 알고 불렀다. 그런데 비블로스는 탈 6:3에서는 분명히 이 ‘YHWH’란 이름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알리지 않으셨다고 말씀한다. 이같은 모순을 히브리 마소라 비블로스를 비롯하여 그 어떤 비블로스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되, 오직 권위역 제임스 왕 비블로스만이 정확히 해결해 주고 있다. 즉 이 ‘YHWH’란 이름 중에는 부를 수 있는 이름과 부를 수 없는 이름이 있었으며, 아브라함이 알고 부른 이름과 알지 못한 이름이 있었으니, 아브라함이 알고 불렀던 이름을 권위역은 ‘LORD’로 표기하였고, 아브라함이 아직 알지 못한 그 이름을 정확히 ‘JEHOVAH’(예호바)로 표기한 것이다. 이 얼마나 정교하고 완벽한 번역인가! 훗날 모세에게 엘로힘*의 이름을 알리실 때에도 아직 ‘JEHOVAH’로는 알리지 않으셨다가(탈 3:15-17), 시들과 이사이아*에서 한 두 번 언급하신 후에, NT에 와서 비로소 ‘예수스’(JESUS = JEHOVAH IS SALVATION)란 완전한 이름으로 분명히 계시하신 것이다(맛 1:21; 요 17:6,11,12; 활 4:12).
권위역 비블로스는 비블로스 전체에서 총 6828회 사용된 ‘YHWH’란 단어를 6820회는 ‘LORD’(몇 군데는 GOD)로, 나머지 8회는 ‘예호바’(JEHOVAH)로 번역하였다. ‘예호바’(JEHOVAH)라는 표기는 단독으로 4 번 사용되고(탈 6:3; 시 83:18; 사 12:2; 26:4), 복합어로 3 번 사용되며(겐 22:14; 탈 17:15; 심 6:24), 축약형인 야(JAH)로 한 번 사용되었다(시 68:4).
이제 그리스어의 경우를 살펴보자. 영어의 Lord 혹은 lord는 대부분 그리스어 큐리오스(kurios)를 번역한 것으로 그 뜻은 절대 권위자(supreme in authority), 조정자(controller), 혹은 권능(kuros, power)을 가지다를 뜻하기도 한다.
큐리오스의 일반용례로서 사람에게 쓰인 경우로는, 소유주(owner)에게 쓰인 경우(뤀 19:33)와, 상전(master)에게 쓰인 경우(맛 6:24; 24:50; 엪 6:5), 황제나 왕에게 쓰인 경우(활 25:26; 계 17:14), 아버지에 대한 존칭으로 쓰인 경우(Sir, 맛 21:30), 남편에게 쓰인 경우(펱첫 3:6), 주인(a master)에 대한 존칭의 경우(Sir, 맛 13:27), 총독에 대한 존칭의 경우(Sir, 맛 27:63), 천사에게 쓰인 경우(활 10:4), 낯선 자에 대한 예우로 쓰인 경우(요 12:21; 20:15; 활 16:30) 등이 있다.
우리 주 예수스께 대하여 쓰인 경우로는 맛 8:2,25; 뤀 5:8; 요 4:11; 6:68 등이 있으며, 특히 예수스*를 OT의 ‘YHWH’에 해당하시는 분으로 보아 ‘Lord’로 표기한 경우로는(NT 본문에서는 LORD의 표기가 사용되지 않고<OT 인용인 경우는 제외> 오직 Lord 표기만 사용되는데, 이는 LORD가 NT에서 JESUS란 이름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으로 사료되며, 따라서 NT에서 예수스*께 사용된 Lord는 OT의 예호바*와 동일시될 수 있다.) 맛 4:7; 7:21,22; 9:38; 22:41-45; 맠 5:19; 요 20:28; 활 2:36; 10:36; 코첫 1:3; 3:20; 얔 5:11; 펱첫 2:3 등을 들 수 있다. 이같은 용례들은 [OT의 예호바 = NT의 예수스]를 성립시키는 한 분 엘로힘*께에 대한 믿음(monotheistic belief)을 반영한다 하겠다.
그 밖에 그리스어 데스포테스(despotes)는 절대 통치자(an absolute ruler)를 뜻하며 이 단어가 뤀 2:29; 활 4:24; 계 6:10 등에서는 엘로힘*께 쓰였고, 펱둘 2:1; 유 1:4 등에서는 크리스토스께 쓰였으며, 팀둘 2:21에서는 주인(master), 팀첫 6:1,2; 팉 2:9; 펱첫 2:18 등에서는 상전들(masters)에게 쓰였다. 또한 권위역은 맠 10:51의 랍보니(rabboni)를 Lord(주)로 번역하였다.
[단어비교]
[활용]
observation, observed, observer, observers, observest, observeth
[의미]
살펴 지키다(탈 12:17,24,42; 31:16; 34:11; 렙 19:37; 숫 15:22; 28:2; 다 5:32; 6:3,25; 8:1; 11:32; 12:1,28,32; 15:5; 16:1,12,13; 17:10; 24:8; 28:1,13,15,58; 31:12; 32:46; 33:9; 슈 1:7,8; 심 13:14; 왕첫 20:33; 왕둘 17:37; 21:8; 연둘 7:17; 네 1:5; 10:29; 시 105:45; 107:43; 119:34; 금 23:26; 사 42:20; 렘 8:7; 켈 20:18; 37:24; 욘 2:8; 맛 23:3; 28:20; 맠 10:20; 활 16:21; 21:25; 갈 4:10; 팀첫 5:21), 지켜 보다(겐 37:11; 삼둘 11:16; 회 11:4; 호 13:7; 14:8; 맠 6:20; 뤀 17:20)
with observation: 지켜볼 수 있게(뤀 17:20)
observe times: 때들을 살펴 지키다(렙 19:26; 왕둘 21:6; 연둘 33:6)
observer(s) of times: 때들을 살펴 지키는 자(다 18:10,14)
[어원]
< L observare watch(v.), observe < ob- before + servare look at, guard, keep, hold
[사용횟수]
겐 37:11부터 팀첫 5:21까지 67구절, 71회 사용됨.
[단어해설]
첫 언급인 겐 37:11의 observe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샤마르(shamar)는 주변을 울타리로 치다(hedge about)를 뜻하는데, 대적들로부터 보호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지켜보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 언급인 팀첫 5:21의 observe에 해당되는 그리스어(헬라어) 풀라쏘(phulasso)는 경계심을 가지고 지켜서 보존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영어 observe의 어원 역시 눈앞에서 살피면서 지켜 보존하는 행위를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비블로스의 용례에 따라 눈으로 살펴 확인하면서 지켜 보존한다는 의미를 살려서 한글로도 '살펴 지키다'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료된다.
때들을 살펴 지키다(observe times)의 경우는 히브리어 아난(anan)을 번역한 것인데, 히브리어 아난의 뜻은 덮다, 은밀히 마술을 행하다를 뜻하는 반면, 그것을 영어로 번역한 observe times는 구체적으로 해와 달과 별들을 관찰하여 시절과 시기들을 살피며, 거기에 따라 각종 절기들을 만들어 지키는 행위들을 가리키고 있다. 우상숭배인 이교적 신앙의 전형적 행태가 그러하며, 그것이 기독교 안에 들어와 혼합신앙이 되어 각종 절기들을 지키는 그릇된 전통들을 형성하였다.
비블로스를 살펴 지키는 것과 상반되는 것이 천체의 시기들과 절기들을 살펴 지키는 것임을 observe란 단어가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단어비교]
observe, keep, see, look, watch, behold
[활용]
parables
[의미]
병유(숫 23:7; 시 49:4; 78:2; 금 26:7,9; 맛 13:3; 맠 4:13; 뤀 6:39; 요 10:6)
[어원]
ME. a.F. parabole, ad. L. parabola comparison; in Christian L. allegory, proverb, discourse, speech, talk, a. Gr. parabole a placing side by side, comparison, analogy, parable, proverb. f. para, beside + bole, casting, putting, a throw.
[사용횟수]
수 23:7부터 요 10:6까지 63구절, 65회 사용됨.
[단어해설]
숫 23:7; 시 49:4; 금 26:7,9의 히브리어 마샬(mashal)은 간결한 격언, 비유 등을 뜻한다.
맛 13:3; 맠 4:13; 뤀 6:39의 그리스어 파라볼레(parabole)는 [파라(para, 곁에) + 발로(ballo, 던지다)]로 구성되어 곁에서 던지다, 즉 병행비교를 뜻하며, 요 10:6의 그리스어 파로이미아(paroimia) 역시 [파라(para) + 오이오마이(oiomai, to make like)]로 구성되어 곁에서 비유하다 즉 병유를 뜻한다.
둘을 병행시켜 비교하고 비유한다는 것이 정확한 의미인 만큼, 단순히 비유라고 번역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비록 신조어일지라도 병유라고 정확히 번역할 필요가 있다. 단지 빗대어 설명하는 데 방점이 있기보다는 병행시켜 비교함으로써 교훈과 지혜를 얻는 데 방점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 문학작품에서는 비유로 처리해도 무방하겠지만, 적어도 비블로스 용례에서는 정확히 번역해 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진리가 빛을 발하고, 저자의 본래 의도와 일치하는 의미전달이 가능한 것이다.
[단어비교]
parable, similitudes
[활용]
passovers
[의미]
넘어감
1. 넘어감 잔치(the feast of passover)의 뜻으로 쓰인 경우: ‘keep the passover’의 형태인 경우(숫 9:2,4,5,6,10,13,14; 다 16:1; 슈 5:10; 왕둘 23:21; 연둘 35:16,17; 맛 26:18; 히 11:28 등)
2. 넘어감의 어린 양(pascal lamb)의 뜻으로 쓰인 경우: ‘kill the passover’의 형태인 경우(탈 12:21; 연둘 30:15,17; 35:1,6,11; 라 6:20; 맠 14:12; 뤀 22:7); ‘sacrifice the passover’의 형태(다 16:2,5,6; 코첫 5:7); 그 밖에 ‘roast the passover’(연둘 35:13)
3. 넘어감의 음식이란 뜻으로 쓰인 경우: eat the passover(연둘 30:18; 맛 26:17; 맠 14:12; 뤀 22:11,15; 요 18:28): 이 경우는 직접적으로 넘어감의 양뿐 아니라 그 양을 기념하여 먹는 음식을 함축하여 의미한다. 그러나 주는 넘어감의 어린 양을 먹는 것이며, 여기에 주안점이 있는 고로 “넘어감의 어린 양을 먹는 것”으로 번역함이 의미를 살려 번역하는 것이라 사료된다.
[어원]
[pass(지나가다) + over(넘어서)]로 구성되어 '넘어서 지나가다'를 뜻한다. 굳이 유월, 과월 등의 어려운 표현보다는 '넘어감'으로 순화하는 것이 의미전달도 충분하고 이해하기도 쉬워서 바람직하다.
[사용횟수]
탈 12:11부터 히 11:28까지 72구절, 77회 사용됨.(OT: 46구절, NT: 26구절)
[단어해설]
권위역 비블로스는 활 12:4의 그리스어 pascha(파스카)를 Easter(이스터)로 번역해 준 유일한 비블로스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어 파스카는 아람어를 음역해 준 것으로서, 히브리어 pasach(파사흐, to pass over, to spare)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권위역이 그리스어 파스카를 다른 곳에서는 모두 passover(넘어감)로 음역해 주었으되 유독 활 12:4에서만 이스터로 번역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활 12:4의 파스카는 유다인의 파스카가 아닌 헤롯의 파스카였기 때문이다. 유다인의 파스카, 즉 passover(넘어감)는 히브리력 정월(아빕월/니산월) 14일로서, 현 태양력의 4월 14일에 해당된다.
유다인의 넘어감이 4월 14일이고(렙 23:5), 뜸씨 없는 빵의 잔치는 4월 15일부터 21일까지 7일 간이며(렙 23:6), 활 12:3에 의하면 페트로스가 체포된 때는 유다인 넘어감의 잔치가 이미 지난 뜸씨 없는 빵의 잔치였다.
그렇다면 이미 체포되어 투옥된 페트로스를 헤롯이 “유다인의 넘어감이 지난 후에”(after passover) 백성들 앞에 끌어내고자 의도하였다면(미래 시점을 의미하므로) 모순이 되어 버린다.
최소한 여기서(활 12:4)의 파스카는 4월 15일을 넘긴 4월 하순경이어야만 앞뒤가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헤롯이 여기서 말한 파스카는 결코 유다인의 파스카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유다인의 파스카가 아니고 또 다른 파스카가 있단 말인가?
우리는 헤롯이 옛 에돔지방 이두메아 출신의 유다인 안티파테르의 아들이라는 사실에서 그가 다른 파스카를 지켰으리란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갈대아(바빌론) 근방의 에돔사람들은 예부터 유다인의 파스카 대신 갈대아의 여신인 하늘의 여왕 아쉬타로쓰(Ashtaroth)의 축제일을 파스카로 지켜왔다. 아쉬타로쓰의 축제일이 해마다 “춘분 지난 만월 직후의 일요일”에 치러진 것은 월신숭배(만월) 및 태양신 숭배(일요일)와 연관되어 있다. 아쉬타로쓰 축제일은 색슨족에 의하여 이스터(Easter)로 발음되어, 그 후부터 이스터 축제일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 때가 겨울이 지난 봄인고로 여신 이스터는 봄의 여신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여기서 춘분 지난 만월 직후의 일요일이 대개 4월 하순경임을 알진대, 활 12:4의 경우 “after Easter”(이스터가 지나면)라는 권위역의 번역이 정확하다는 사실에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제 유다인의 넘어감은 4월 14일이었고, 페트로스가 투옥된 것은 4월 15일(중순) 이후였으며, 페트로스를 백성들 앞에 끌어내려 한 때는 4월 하순인 “이스터가 지난 후”(after Easter)라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제거되었고, 권위역 비블로스의 정확성이 여기서도 여실히 입증되고 있다.
오히려 의문이 남게 되는 것은, 오늘날 기독교가 왜 부활을 기념하는 날을 ‘이스터’(Easter)라 부르며, 그것도 춘분 지난 만월 직후 일요일을 부활절(이스터)로 지키는가 하는 점이다. 혹 하늘의 여왕 숭배가 이스라엘에 침투한 것처럼(렘 7:18; 44:17-19,25), 기독교 안에도 깊이 침투한 때문은 아닐까?
[단어비교]
passover, easter, pascha
[활용]
pastors
[의미]
목자(牧者, 렘 2:8; 3:15; 10:21; 12:10; 17:16; 22:22; 23:1,2; 엪 4:11)
[어원]
< L pastorem feeder, giver of pasture,
< OE < sceaphird < sceap sheep + hirde herd
[사용횟수]
렘 2:8; 3:15; 10:21; 12:10; 17:16; 22:22; 23:1, 2; 엪 4:11에 9구절, 9회 사용됨.
[단어해설]
shepherd의 어원은 [< OE < sceaphird < sceap sheep + hirde herd]로서, 양을 모는 사람, 양을 치는 사람을 뜻한다.
pastor의 어원은 [< L pastorem feeder, giver of pasture]로서 단지 풀을 주는 사람을 뜻하고 있다.
이 두 단어는 의미상으로는 대동소이하나, 대상이 양인 경우가 shepherd이고, 대상을 가리지 않고 초장에서 풀을 먹이는 역할을 가리키는 것이 pastor라 할 수 있다.
단지 풀만 먹이는 기능으로 국한된 경우는 없고, 막대기로 몰아가거나, 전반적으로 관리하고 기르는 개념으로선 두 단어가 대동소이하다 하겠다. 권위역 비블로스에서 pastor(s)의 용례는 초장에서 양떼를 먹이는(pasturing) 자를 주로 비유적 의미로서 지칭하였다.
OT에서는 오로지 예레미야서에서만 8번 사용되었으며, 히브리어 라아흐(raah)를 다른 곳에서는 shepherd(목양자)로 번역하였는데, 오로지 예레미야서에서만 pastor(s)(목자)로 번역한 것은 목양자(shepherd)의 역할 중에서도 꼴을 먹이는 역할을 부각시키고자 한 의도로 보인다. 즉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의 꼴을 제대로 먹이지 못한 자들에 대한 책망과 경고의 성격이라 할 수 있다(렘 2:8; 3:15; 10:21; 12:10; 22:22; 23:1,2).
NT에서는 오로지 에페수스*인들 4:11 한 곳에서만 이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그리스어 포이멘(poimen) 역시 다른 곳에서는 shepherd(목양자)로 번역하였고, 유독 엪 4:11에서만 pastors(목자)로 번역하였다.
NT에서 shepherd(목양자)가 비유적으로 사용될 때는 주님을 지칭할 때만 사용되었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목양자의 역할은 꼴을 먹이는 일뿐 아니라 양떼를 몰아 인도하는 일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pastor(목자)는 비유적으로 사용될 때도 오로지 꼴을 먹이는 역할에 국한된다 하겠다.
pastor를 우리말로 목사(牧師)로 번역한 것은 원뜻에서 다소 멀어진 감이 없지 않으며, 오히려 Reverend를 번역한 것이 현재의 목사(牧師)개념에 가깝다 하겠다. 그러나 Reverend란 칭호가 비블로스에서는 엘로힘*께만 사용되었음에 각별히 유의해야 할 것이다(시 111:9).
pastor(목양하는 자)란 단어는 신분의 개념이 약한 반면 기능적 개념이 강하며, 더욱이 shepherd(목양자)에서 지도자(leader)의 개념이 빠진 개념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신분개념이 강한 순으로 나열하면, Shepherd(목양자)-bishop(감독)-pastor(목자)의 순서가 된다 할 것이다.
따라서 pastor를 우리말로 ‘목사’(牧師)나 ‘목양자’(牧羊者)라 번역하기 보다는 “목자”(牧者)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뜻에도 가깝고 기능적 의미도 잘 부각되어 합당하리라 사료되는 것이다.
엪 4:11에서 pastors(목자)와 teachers(교사)를 한데 묶어 소개한 것은 이 두 기능의 상호연관성 때문일 것이다.
비블로스에서 elders(장로) 혹은 bishops(감독)와 deacon(집사)은 왕가(교회)의 직분(office)으로, pastors(목자)와 teachers(교사)는 은사(gifts)로 분류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오늘날 왕가(교회)의 직분과 은사가 크리스토스의 몸을 섬기는 순수한 기능으로 보다는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 혹은 성직계급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비블로스의 본 뜻에서 달라진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단어비교]
shepherd(목양자), pastor(목자)
[활용]
prayed, prayer, prayers, prayest, prayeth, praying
[의미]
간청하다(겐 12:13; 요 14:16)
I pray: 내가 간청하니(겐 12:13; 활 24:4)
prayer(s): 간청(들)
#비블로스에서 최초로 언급된 간청: 내가 당신에게 간청하니(겐 12:13): 아브람이 자기 아내에게 여동생이라 말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한 사례에서 처음으로 간청이란 단어가 사용됨. 즉 사람이 사람에게 간청한 사례가 최초.
#NT에서 최초로 언급된 간청: 너희를 악의적으로 대하여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간청하라(맛 5:44)
the effectual fervent prayer of a righteous man availeth much: 의인의 효과적이며 열렬한 간청은 많은 효력이 있습니다(얔 5:16)
# 팀첫 2;1: 간구들, 간청들, 중보들, 그리고 감사들을 드리는 것(supplications, prayers, intercessions, and giving of thanks)
[어원]
< OE preier < L precari beg, pray
[사용횟수]
겐 12:13부터 계 8:4까지 511구절, 545회 사용됨.
[단어해설]
눈 감고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종교적 의식은 이교도에서 비롯되었고, 비블로스에는 없다. 오히려 비블로스에서는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을 펼쳐 간청하는 경우가 많고, 그것도 두 눈을 뜨고서 하늘을 향해 바라보며 간청하곤 하였다.
기도를 엘로힘*과의 대화로 가르치거나, 영적인 호흡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비블로스 용례와 맞지 않다. 엘로힘*과의 대화에는 무슨 특별한 종교적 의식이 요구되지 않다.
엘로힘*이 계신다고 믿으면, 즉시 대화가 가능하다. 모세스가 엘로힘*과 대화할 때에,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하듯 하였다(탈 33:11).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계신다고 믿는다면,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대화는 대화이고, 호흡은 호흡이다. 기도가 곧 대화이고 호흡인 것은 아니다.
기도 자체가 오역이다. 영어 pray는 간절히 청한다는 뜻이지, 그 자체가 대화나 호흡을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글로 간청하다로 번역하면 정확하다. 명사형인 prayer는 기도가 아니라 간청으로 번역해야 옳다.
간청(prayer)은 간절함만큼이나 특별한 것이다. 일반적인 대화가 아니라 특별한 청원을 가리킨다. 비블로스의 용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원래 간청하다(pray)란 단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용되던 단어가 사람과 엘로힘*께도 자연스럽게 같이 사용된 사실을 비블로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겐 12:13에서 처음으로 간청하다(pray)란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아브람이 자기 아내에게 사용한 말이었다. 사람이 엘로힘*께 이 단어를 사용한 최초의 사례가 겐 20:7,17에 나오는데,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 엘로힘*께 간청할 때에 동일한 단어인 간청하다(pray)가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비블로스의 용례에 따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나, 사람과 엘로힘* 사이에서 간절히 부탁하거나 청원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바로 간청(prayer)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일반화된 기도는 엘로힘*과의 자연스런 대화를 종교의식으로 대체시킴으로써 어렵게 만들고, 오히려 소통에 방해가 되고 있다.
기도란 번역은 명백한 오역이다. 반드시 간청으로 바로잡아야 진정한 소통이 이뤄질 수 있다.
[단어비교]
prayer(간청), supplication(간구), intercession(중보)
[활용]
priesthood, priest's, priests
[의미]
성직자(聖職者)
chief priest: 수성직자
high priest: 대성직자
second priest: 두 번째 성직자(왕둘 25:18; 렘 52:24)
priesthood: 성직자직(탈 40:15; 숫 16:10; 18:1; 25:13; 수 18:7; 라 2:62; 네 7:64; 13:29; 히 7:5,11,12,14,24; 펱첫 2:5,9)
priest's office: 성직자 직분(탈 28:1,3,4,41; 29:1,9,44; 30:30; 31:10; 35:19,41; 40:13,15; 렙 7:35; 16:32; 숫 3:3,4,10; 18:7; 다 10:6; 연첫 6;10; 24:2; 연둘 11;14; 뤀 1:8,9): 총 26회 사용됨.
holy priesthood: 거룩한 성직자직(펱첫 2:5, 비블로스에 한 곳뿐)
royal priesthood: 왕다운 성직자직(펱첫 2:9, 비블로스에 한 곳뿐)
[어원]
< Sax. præst < L. præstes: præ, before
+ sto, to stand; Gr. presbyteros, elder와 동계
[사용횟수]
겐 14:18부터 계 20:6까지 846구절, 960회 사용됨.
[단어해설]
영어 priest의 라틴어 어원은 [præstes: præ, before + sto, to stand]로서 “앞에 서다”란 뜻을 지닌다.
priest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코헨(kohen)에는 ‘최고 지도자’란 뜻도 있고, 거룩한 일 특히 희생물을 담당하는 ‘성직자’란 뜻이 있다(겐 14:18; 탈 18:12 참조).
priest의 그리스어 히에류스(hiereus) 역시 거룩(holy)을 뜻하는 히에로스(hieros)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거룩한 직무를 수행하는 자’란 뜻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priest의 어의는 ‘앞에 서는 자’ 혹은 ‘경배하는 자’란 뜻에서 파생되어, 주로 세속에서 구별된 영적 직무를 수행하는 영적 책임자를 지칭하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비블로스에서 priest의 용례는 대부분 지극히 높으신 엘로힘*의 거룩한 일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방인의 경우는 극히 드물다.
비블로스상의 priest 개념은 “거룩성”(holiness)과 “직분”(office)와 “신분”(status)으로 특징지워진다. “거룩성”이란 세속으로부터의 분리(separation)와 순수성(purity)을 의미하며, “직분”이란 희생(sacrifice)을 드리는 일과 엘로힘*의 말씀을 맡아 지키는 제반 사역을 포함하며(탈 19:5,6; 롬 3:1,2), “신분”이란 왕적 권리와 최고의 지위를 보장하는 것이다.
priest의 어의와 비블로스적 개념에 상응하는 우리말을 찾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우리말 자체가 이교적 전통문화와 무속신앙의 바탕 위에 형성된 고로, 애초부터 우리의 어휘에서 비블로스적 거룩의 개념을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priest의 어의를 살린 “성직자”(聖職者)란 번역이 비교적 비블로스적 priest의 용례에 가깝다고 사료된다. 제사장(祭司長) 혹은 사제(司祭)란 번역은 우리의 무속신앙을 그대로 반영한 무당개념인고로, “거룩성”에도 위배되고, “직분”에 있어서도 제사 개념이 희생 개념과 다소 이질적일 뿐 아니라, 엘로힘*의 말씀을 맡아 지키는 사역과도 맞지 않고, “신분”에 있어서도 무당으로서의 엘로힘의 대리자적 신분이 엘로힘*의 자녀들의 신분과는 동떨어진 점이 인정되기에 적합하다고 볼 수 없다. 물론 이교적 priest나 바알의 priest의 용례도 있어서 무당이나 사제와 방불하지만, 이교도나 바알 종교 같은 거짓 종교에서도 priest를 자기 나름대로의 “성”(聖)의 개념으로 보기에 그 경우에도 “성직자”(聖職者)로 표기함이 무방하다 사료된다.
지금까지 한글역본들이 priest를 우리말로 “제사장” 혹은 “사제”로 번역한 것은 priest의 본래의 어의와 비블로스적 개념에서 지나치게 양보하여 토착화시킨 결과로서, priest의 원의미를 제대로 반영치 못하므로 반드시 재고되어야 한다고 본다.
더욱이 엘로힘*이신 우리 주 예수스 님을 무당을 뜻하는 “제사장”(대제사장)으로 번역해야만 하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까지는 preist를 “제사장”이나 “사제”로 이해하는 것이 보편화되고 굳어 있긴 하지만, priest를 “성직자”로 이해하는 것이 새롭게 보편화되고 관용화 될 경우 오히려 의미의 전달도 용이하고 본래의 어의도 잘 반영하게 될 뿐 아니라, 특히 비블로스상의 priest 개념을 제대로 살리게 되는 결과가 될 것이다.
priest를 “성직자”로 번역하게 되면, 그릇된 성직계급제도의 폐단도 방지하는 효과도 기대된다.
모든 믿는 자를 “성직자”라고 부르게 되면(펱첫 2:9), 성직계급의 개념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성직자와 평신도가 비블로스상으로 동일 개념으로 이해될 것이다. 비블로스에서 평신도에 해당되는 그리스어 “라오스”(laos)는 “엘로힘*의 백성”을 통칭하는 개념인고로 모든 믿는 자를 “성직자”로 규정한 펱첫 2:9에 의하면 priest(성직자) = laos(엘로힘*의 백성)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어의를 정확히 반영하고 비블로스상의 용례와 개념을 충분히 살려서 번역하게 되면, 용어의 개념과 원의미도 순수하게 보존될 뿐 아니라, 비블로스의 계시도 제대로 전달됨으로써, 비블로스의 권위와 신뢰를 한층 드높이게 될 것이다.
[단어비교]
priest, minister, reverend
[활용]
prophecy, prophecies, prophesied, prophesieth, prophesying, prophesyings, prophet, prophet`s, prophets, prophetess
[의미]
대언하다
prophet(s): 대언자 프로페테스
prophetess: 여대언자(왕둘 22:14)
prophecy(ies): 대언
prophesying(s)
[어원]
< Gk prophetes < pro, before, publicly + phemi, speak
[사용횟수]
겐 20:7부터 계 22:19까지 575구절, 669회 사용됨.
[단어해설]
prophecy의 영어 어원은 {< Gk prophetes < pro, before, publicly + phemi, speak}로서 “앞에서 말하다” 혹은 “공적으로 말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prophecy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비(nabi)는 ‘숨 넣으심에 의하여 말하다’(speak by inspiration)를 뜻하고, 그리스어 프로페테이아(propheteia)는 ‘앞에서 말하다’(speak forth)를 뜻한다.
일반적으로 ‘미리 말하는’(fore-telling) 것으로 이해하지만, 보다 정확한 뜻은 ‘앞에서 말하는’(forth-telling) 것이라 하겠다. 물론 앞에서 말하는(forth-telling) 것에 미리 말하는(fore-telling) 뜻도 포함될 수 있으리라 본다.
탈 4:16; 7:1; 다 18:18 등에 보면 prophecy의 비블로스적 정의(定義)는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람의 입을 대신하여 말하는 것”(speaking for another, or his mouth)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엘로힘*의 말씀과 관련하여 prophecy는 “엘로힘*의 말씀을 직접 받아서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말씀 중에는 미래와 종말에 대한 예언도 포함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prophecy가 예언 개념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prophecy를 우리말로 옮긴다면, ‘예언’(豫言) 보다는 ‘대언’(代言)이라 함이 보다 타당하다 하겠다. 또한 prophet도 ‘예언자’(豫言者)나 ‘선지자’(先知者) 보다는 ‘대언자’(代言者)로 번역함이 바람직할 것이다. 혹자는 맡길 예(預) 자를 써서 ‘예언자’(預言者)로 표기하기도 하나, 이 역시 prophet의 정확한 의미라 볼 수 없고, 더욱이 우리말로는 예언자(豫言者)와 구분이 어려워 문제가 있다. 또한 ‘선지자’(先知者)란 말도 ‘남보다 먼저 도(道)를 깨우친 사람’이란 뜻으로 prophet의 의미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권위역 비블로스에는 prophet(대언자)과 seer(선견자)와 diviner(예언자, 점쟁이)가 잘 구분되어 사용되고 있다. prophet(대언자)은 ‘엘로힘*의 말씀을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자’(펱둘 1:21; 코첫 14:3)란 의미로 사용되고, seer(선견자)는 ‘환상을 보는 자’(연첫 29:29)란 의미로, diviner(예언자, 점쟁이)는 ‘앞일을 미리 알아맞히는 자’(렘 27:9)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비블로스에서 대언자(prophet)는 사도(apostle)와 함께 “엘로힘*의 말씀을 위해 부르심 받은 자들”로서 크리스토스의 몸된 왕가(교회)의 기초(foundation)가 되었다(엪 2:20). 그들의 사역은 말씀기록까지였고, 따라서 비블로스가 완성되면서 그들의 임무도 마감되었으며, 그 후로는 대언자와 사도의 권위가 오로지 비블로스에 귀속되게 되었다.
[단어비교]
prophesy, foresee, foretell, divine, soothsay
[활용]
rendered, renderest, rendereth, rendering
[의미]
돌려주다(숫 18:9; 왕둘 3:4; 욥 33:26; 시 28:4; 렘 51:24; 맛 21:41; 펱첫 3:9), 돌려드리다(맛 22:21; 뤀 20:25),
render a reason: 이성을 돌려주다(금 26:16), 여기서 'a reason'이란 이성 자체가 아닌 이성의 (특정)기능을 가리킨다. 비블로스 전체에서 단 한 번 사용된 독특한 표현을 통해서 게으름은 이성이 마비되거나 비정상적인 상태라는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render recompence: 보응을 돌려주다(사 66:6; 렘 51:6; 렘애 3:64; 욜 3:4)
[어원]
< L. reddere, to give back, f. red-RE- back + dare to give
[사용횟수]
숫 18:9부터 펱첫 3:9까지 40구절, 40회 사용됨
[단어해설]
히브리어 슈브(shuwb)는 되돌리다(turn back),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다를 뜻하며, 그리스어 아포디도미(apodidomi)는 주어버리다(give away), 다시 주다(give again)를 뜻한다.
이 단어의 정확한 어의와 비블로스 용례의 독특함은 give, bestow 등과는 구분해야 할 필요성을 말해준다. 특히 창조주와 피조물인 인간의 관계에서 미리 예비해 놓았다가 합당한 조건과 시기에 돌려준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것이 은혜의 선물이든 배반에 대한 징벌이든 간에 인간의 행위와 선택에 따라서 그대로 돌려주신다는 의미다.
가령 삼첫 26:23과 욥 33:26의 경우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그의 의 혹은 그의 믿쁨 충만함을 돌려주신다고 했을 때, 소유격 대명사 ‘그의’(his)는 창조주가 아닌 인간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의와 믿쁨 충만함이 처음부터 인간을 위해 예비된 인간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돌려주신다는 개념이 성립된다. 만일 창조주의 의와 믿쁨 충만함이라면 돌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시거나(give) 베푸시는(bestow) 것이라 해야 맞다.
여기에는 놀라운 신비가 있다. 의와 믿쁨은 인간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창조주에게서 난 것이기에 창조주의 선물 개념인데, 인간의 행위와 선택이 결합되어 있는 의와 믿쁨이기에 신성화의 신비에 속한다.
비블로스의 용례에 따른 정확한 의미를 확인해 보면, 이같이 신성화의 신비를 발견하는 수확을 거두기도 한다.
[단어비교]
render, give, bestow
[활용]
replenished
[의미]
가득 채우다(겐 1:28; 9:1; 사 2:6; 23:2; 렘 31:25; 겔 26:2; 27:25), 다시 채우다
[어원]
f. OF. repleniss-, lengthened stem of replenir: re(again, back) + plenish(to fill)
[사용횟수]
겐 1:28; 9:1; 사 2:6; 23:2; 렘 31:25; 겔 26:2; 27:25에 7구절, 7회 사용됨.
[단어해설]
비블로스에서 7번 사용된 이 단어는 히브리어 말레(male, 혹은 mala)로서, 주로 충만, 만족, 성취 등의 의미에서 파생하여 문자적, 혹은 상징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테 7:5의 말라(mala)는 추정하다(presume)의 뜻으로, 마음속에 품고 상상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때로는 이 단어가 ‘끝을 보다’(be at an end), ‘종료되다’(be expired), 혹은 ‘손을 채우다’(to fill the hand), ‘봉헌하다’(consecrate)란 뜻으로도 쓰였다.
영어 replenish는 [re, again + plenish, to fill]로 구성되어 ‘다시 채우다’(to fill again)로 이해할 수도 있으나, 실제 용례에서는 re가 의미를 강하게 하는 강세 용법으로 쓰여, 채우는 상태를 강하게 하는 의미로서 주로 사용되어왔다.
실제로 이 단어가 주로 사용된 14세기부터 19세기까지 용례의 대부분은 ‘가득 채우다’, ‘온전히 채우다’, ‘끝까지 채우다’ 등의 의미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비블로스의 용례들도 한결같이 다시 채운다는 뜻보다는 가득 채운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히브리어 말레의 뜻도 그러하거니와, 의미에 있어서도 채우는 횟수보다는 채우는 상태를 강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단어비교]
replenish, fill, refill
[활용]
scribes
[의미]
비블로스*학자(들)(삼둘 8:17; 20:25; 연둘 34:13; 라 7:6,12; 네 8:1; 마 2:4; 13:52; 17:10; 23:2; 13-29; 행 4:5; 6:12; 23:9), 서기관(들)(왕둘 12:10; 25:19; 연둘 24:11; 라 4:8,9,17,23; 테 3:12; 8:9; 사 33:18; 렘 52:25), 학자(코첫 1:20)
[어원]
< L scriba, clerk < scribere, write
[사용횟수]
삼둘 8:17부터 코첫 1:20까지 120구절, 122회 사용됨.
[단어해설]
영어 scribe의 라틴어 어원은 [scriba, clerk < scribere, write]로서 “기록하다”, “기록자”를 뜻한다. scribe의 히브리어 사파르(capar)는 동사로는 새겨넣다(inscribe)를, 명사로는 기록자(writer)를 뜻한다. 그리스어 그람마투스(grammateus)도 ‘새기다’, ‘기록하다’를 뜻하는 그라포(grapho, to grave)에서 파생되어 ‘기록하는 사람’을 뜻한다.
기록의 중요성만큼이나 기록자도 존중받았는데, 단지 기록 자체뿐 아니라 기록과 관계된 모든 업무들을 맡기다 보니 그 역할과 지위도 상당하였다.
일반적으로 ‘서기관’이라 번역하고, 총무, 비서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며, 특정 분야의 전문가로서 학자라 불리기도 한다.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비블로스*를 기록하고 편찬하며, 해석하고 가르치는 서기관을 비블로스*학자라고 불렀다.
비블로스*에 첫 언급된 경우(삼둘 8:17)도 비블로스*학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동시에 비블로스*학자와는 별도로 기록만을 맡은 ‘기록관’(recorder)을 따로 두었다(삼둘 8:16; 20:24; 연첫 18:15 등).
다비드 왕이 온 이스라엘*을 통치하면서 처음으로 비블로스*학자를 두었는데, 실제로 이스라엘 서기관의 주업무가 모세스의 법 등 당시의 비블로스*를 기록하고 편찬하며 해석하고 가르치는 학자로서의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삼둘 8:17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최초의 비블로스*학자는 세라이아(Seraiah)였는데,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비블로스* 회복운동을 주도한 에쯔라*(Ezra)가 바로 세라이아의 16대손이다(라 7:1-6). 에쯔라*를 ‘준비된 비블로스*학자’라고 소개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왕들 중에서도 비블로스*를 존중하지 않는 왕은 일반 의미의 서기관 제도를 채택하기도 하였고(왕둘 12:10), 일반 군대 행정에서도 백성을 징집하는 군대 주 서기관(the principal scribe of the host)이 있었다(왕둘 25:19).
이방 왕들의 경우는 당연히 일반 행정조직에 왕의 서기관들을 두곤 하였다(테 3:12).
이렇듯 비블로스*를 알고 존중한 다비드* 왕 이래로 서기관을 대신하여 비블로스*학자와 기록관 제도가 생겼고, 참다운 비블로스*학자인 에쯔라*에 의해 가까스로 비블로스*가 회복되어 새유언(NT) 시대로 넘어왔다.
새유언 맛 2:4부터 활 23:9까지 60번 이상(65회)사용된 scribe(s)는 서기관이 아닌 비블로스*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로 분류되었다. 에쯔라* 이후로 비블로스*학자의 전통을 이어받은 자들은 마소라들이었지만, 바빌론 사상을 이어받은 랍비들도 스스로 비블로스*학자 행세를 하며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 노릇을 했던 것이었다. 에쯔라*의 전통을 이어받은 참된 비블로스*학자들도 있지만, 비블로스*를 변개시키고 종교적 위선자들이 된 가짜 비블로스*학자들도 있었던 것이다.
예수스*의 지상생활 당시에도 가짜 비블로스*학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참된 비블로스*학자도 존재하였다. 가령 맛 13:52에서 언급하였듯이 하늘의 왕국을 위하여 교육받은 비블로스*학자는 가짜가 아닌 참된 비블로스*학자임을 알 수 있다.
에쯔라*가 참된 비블로스*학자의 모범을 보여준 이래로 이스라엘 가운데 비블로스*학자야말로 진정한 학자라는 인식이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우리 주*님께서도 대언자들과, 현인들과, 학자들(scribes)을 보내셨다고 하셨는데(맛 23:34), 여기서 현인들과 함께 언급된 학자들은 참된 비블로스*학자들처럼 진정한 학자들을 가리킨 것이었다. 사도 파울로스도 같은 맥락에서 학자가 어디에 있느냐고 반문한 것이었다(코첫 1:20).
비블로스* 전체에서 scribe의 첫 언급은 ‘비블로스*학자’로 시작하여(삼둘 8:17) 마지막 언급은 ‘학자’로 마치고 있는데(코첫 1:20), 이 역시 비블로스*학자가 참된 학자라는 사실과 맥을 같이 한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학자가 있다. 비블로스* 출신의 학자가 있고, 학교(school) 출신의 학자가 있다. 사도 파울로스도 원래는 가말리엘 문하생으로서(활 22:3) 학교 출신 학자였지만, 회심하여 크리스토스의 사람이 된 이후로는 비블로스*학자가 되었다. 물론 월등한 비블로스* 학식
때문에 이전의 학식을 똥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는 고백과 함께(빌 3:8).
KJV(제임스왕역본) 역자들 역시 학교 출신 학자들로서 비블로스*학자들이 된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들 역시 사도 파울로스처럼 이전 학식과 이후 학식의 근본적 차이를 간파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연관 낱말들의 번역증거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따름이다.
일단 서기관, 비블로스*학자, 학자의 구분 없이 모두 scribe(스크라이브)로 통일하여 번역해 준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기록자라는 어의에 충실하고 문맥상 무엇을 기록하는 자인지 구분케 한다는 의도는 알겠으나, 문제는 그 기록자가 오늘날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기 어렵고, 그렇게 되면 정작 말씀의 적용대상이 해당 없음 처리가 되어 말씀 자체가 효력을 상실하게 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오히려 문맥상 일반 서기관이면 서기관이라 번역하고, 비블로스*학자이면 정확히 비블로스*학자라 번역하며, 그냥 학자를 가리키면 정확히 학자라고 번역해 주어야 말씀이 정확한 대상자에게 적용되어 제대로 효력을 발생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제임스왕역본이 번역되던 1611년 당시에 학자에 해당되는 낱말이 scribe밖에 없었다면 납득할 수도 있지만, 그럴지라도 최소한 일반 서기관과 비블로스*학자는 명확히 구분했어야 했다. 적용대상이 모호한 번역은 결코 착한 번역일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학자 하면 영어로 스콜라(scholar)이며, 스크라이브(scribe)를 학자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정작 KJV 본문에서는 스콜라라는 낱말을 학자가 아닌 학생의 의미로만 사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연첫 25:8; 말 2:12).
이렇게 되면 비블로스* 독자들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스크라이브에 대한 경고의 말씀은 서기관에 대한 경고로 이해하기 십상인데 오늘날 종교 지도자들 중에 서기관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결국 경고대상이 없어 말씀의 효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원래 경고의 대상은 위선적인 가짜 비블로스*학자들이었는데, 정작 학자에 해당하는 스콜라라는 낱말이 학생(student)의 의미로만 사용되면 누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다.
그렇다면 KJV 역자들은 원래 스콜라라는 낱말에 학자란 의미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옥스퍼드 영영사전(OED)에 보면 스콜라(scholar)의 연도별 용례가 잘 나와 있다: 특히 3. a. 항목에 보면, "학교들에서 지식을 습득한 자로서; 박식하고 학식 있는 사람; 특히 그리스어나 라틴어 같은 고전어 및 문학에 박식한 사람"이라고 뜻풀이되어 있고, 1607년 용례와 1621년 용례에선 신사(Gentleman)와 학자(scholer)라는 예문이 명확히 나와 있다. 당시 유럽의 최고 학자들이었던 KJV 역자들이 이런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물론 스콜라의 어원이 학교에서 지식을 습득한 학생이란 뜻에서 비롯되었기에 학생으로 번역한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용대상의 정체성을 밝혀주는 결정적 단서인 스콜라라는 낱말을 학자란 뜻이 있는데도 굳이 학생의 뜻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더더구나 진리의 책인 비블로스*의 번역에서 이런 실수는 치명적이다. 학자도 결국 대학이란 학교의 학생이고 그저 어원에 충실한 번역이었다고 납득할 수는 있지만, 용납할 수 없는 이유이다.
진리의 책인 비블로스* 번역은 정확성이 생명이다. 영*의 인도를 받은 번역이라면 정확한 번역의 열매로써 증거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볼 때 KJV 역자들은 비블로스*학자들을 서기관으로 착각하게 만들었고, 정작 학자에 해당하는 스콜라는 학생으로 번역하여 혼란을 야기한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학교가 스콜라주의 산물이며, 스콜라 학교가 배출한 학생이 바로 스콜라라는 학자이며, 자신들도 학교 출신 학자들이라는 사실을 KJV 역자들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스콜레(schole)를 학교(school)로 번역하였고(활 19:9), 파이다고고스(paidagogos)는 학교스승(schoolmaster)으로 번역하였을 것이다(갈 3:24,25).
그런데 정작 스콜라(scholar)라는 낱말의 뜻을 굳이 학자 대신 학생으로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연첫 25:8; 말 2:12).
원래 그리스어 스콜레(schole)는 여가(leisure, 레저), 바캉스란 뜻인데,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노동현장을 빠져나와 레저를 즐기면서 토론하고 강의하던 스콜레라는 건물에서 학교제도가 생겨난 것이었다.
아테네의 스콜레에서 출발하여 중세 스콜라철학이 발전하였고, 로마카톨릭의 수도원에서 스콜라철학을 바탕으로 성직계급 양성소인 학교제도가 생겨났다. 결국 스콜라주의와 수도원이 학교제도를 낳았고, 학교가 대학교(university)로 발전하면서 대학교가 배출한 학생들이 학위를 인정받아(PhD) 학자들이 된 것이다.
오늘날 학교 출신 학자인 스콜라들이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들은 지식인, 전문가, 교수, 신학자, 과학자 등으로 각계각층에서 엘리트 지도층이 되어 눈부신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비블로스*의 입장은 다르다. 비블로스* 용례는 진정한 학자가 학교 출신 학자가 아니라, 비블로스*가 배출한 학자라는 사실을 정확한 낱말들로써 보여주고 있다.
사도 파울로스 역시 활동들 17-19장에서 제시한 아테네, 에피쿠로스, 스토아, 철학자들, 알렉산드레우스, 스쿨(학교) 등등의 낱말들을 통해 스콜라주의 학교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스콜라 학생들이 참된 학자가 아님을 증거하고 있다.
옥스퍼드 영영사전(OED)은 스크라이브(scribe)의 용례를 이렇게 설명한다:
일반적인 의미로는 기록을 맡은 공직자를 가리키고, 또한 박식한 사람(a man of learning)이나 학자(a scholar)의 의미로도 사용되었으며, 특히 바빌론 포로 이후 비블로스*를 회복한 에쯔라*(Ezra)를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에쯔라* 7장, 네헤미아* 9장 등).
에쯔라*야말로 참된 비블로스*학자였고, 진정한 의미의 학자였다는 사실을 결국 옥스퍼드 사전도 인정한 셈이다.
[단어비교]
scribe: 서기관(왕둘 12:10; 25:19), 비블로스*학자(삼둘 8:17; 20:25), 학자(코첫 1:20); writer: 글 쓰는 자; recorder: 기록관(삼둘 8:16), the learned: 박식한 자(사 50:4), schorlar: 학생(말 2:12)
[활용]
scriptures
[의미]
비블로스*기록(들)(단 10:21; 맛 21:42; 22:29; 요 5:39; 7:38,42; 10:35; 19:37; 활 1:16; 18:24; 롬 1:2; 4:3; 9:17; 10:11; 11:2; 코첫 15:3,4; 갈 3:8,22; 4:30; 팀첫 5:18; 팀둘 3:15,16; 약 2:8,23; 4:5; 펱첫 2:6; 펱둘 1:20; 3:16)
[어원]
scribe의 명사형: < L scriba, clerk < scribere, write
[사용횟수]
단 10:21부터 펱둘 3:16까지 53구절, 53회 사용됨.
[단어해설]
단 10:21부터 펱둘 3:16까지 53회 사용된 중에 OT에서는 단 한 번 다니엘 10:21에서 ‘in the scripture of truth’(진리의 비블로스*기록)란 표현으로 나오고 나머지 52 번은 모두 NT에서 사용되었다.
비블로스에서 팀둘 3:15을 제외하고는 그리스어 그라페(graphe)를 사용하고 있다. 그라페는 기록문서(a document), 거룩한 공문서(holy Writ) 등을 뜻한다. 팀둘 3:15의 그람마(gramma)는 기록(a writing), 책(book) 등을 뜻한다.
scripture(s)란 단어가 NT의 계시에 해당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특히 요 7:38,42; 19:37; 롬 4:3; 9:17; 10:11; 11:2; 15:4; 갈 3:8,22; 팀첫 5:18; 얔 4:5 등에서 scripture(s)를 인격화하여 말씀하고, 인내하고, 위로하며, 예견하고, 가두고 하는 등의 표현들이 매우 독특하다.
이 단어는 계 6:14의 scroll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비블리온(biblion, 책이란 뜻)이 오늘날 비블로스를 뜻하는 Bible이 된 것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scripture(s)는 기록문서에 역점을 둔 경우이므로 비블로스*기록이라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단어비교]
엘로힘* 말씀의 표현: word 말씀; law 법; commandments 명령; ordinances 법령; ways 길; testimony 증거; judgments 판결, 판단; statutes 법규; precepts 훈계, 훈령; scriptures 말씀기록들; book 책; oracles of God 엘로힘*의 말씀들
[활용]
testator
[의미]
유언(맛 26:28; 맠 14:24; 뤀 22:20; 코첫 11:25; 코둘 3:6,14; 히 7:22; 9:15,16,17,18,20; 계 11:19)
testator: 유언자(히 9:16,17)
[어원]
{< L testamentum, declaration of one`s will < testari, be a witness}
test[<OF test < L testa earthen pot, shell: 옛날 연금술에서 금인지 아닌지를 시험하기 위한 그릇을 뜻한 것이, 그 시험하는 동작을 가리키게 된 말: 동계어 testament, testify, testimony]
[사용횟수]
맛 26:28부터 계 11:19까지 13구절, 16회 사용됨.
[단어해설]
권위역에서 맛 26:28부터 계 11:19까지 총 14회 사용된 testament란 이 단어는, 오늘날 비블로스를 Old Testament와 New testament로 칭할 만큼 매우 중요한 단어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 Testament란 단어가 권위역 제임스 왕 비블로스를 특징 지워 주는 대표적인 단어라는 데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비록 비블로스의 명칭으로 일반화되어 있긴 하지만, 이 단어가 비블로스 본문에 사용되고 있는 비블로스는 권위역 제임스 왕 비블로스 외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가령 NIV나 NASV에서는 단 한 단어도 사용되지 않았다.). 더욱이 비블로스 본문에 무려 14회나 이 단어가 사용된 비블로스는 유일하게 안티오키아 비블로스인 권위역 제임스 왕 비블로스뿐이다.
Testament의 라틴어 어원인 testamentum은 “사람의 유언을 선언하는 것”(declaration of one`s will)을 뜻한다. 이 단어가 OT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오직 NT에서만 사용된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Testament의 그리스어 디아쎄케(diatheke)는 “유언 등에 의한 재산 처분권”(a disposition of property by will or otherwise)을 의미한다. 이 단어가 계약(covenant)을 뜻하는 히브리어 베리트(berit, 렘 34:18)의 번역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권위역에서 ‘디아쎄케’가 covenant로도 번역되고(뤀 1:72; 활 7:8; 히 8:9,10), testament로도 번역되었음은(맛 26:28; 히 7:22; 계 11:19) 분명하다.
비블로스의 용례로 볼 때에 언약(promise, 약속)은 성취될 일에 대한 예언적 성격을 띠는 반면, 계약(covenant)은 쌍방의 언약에 대한 법적 구속력을 의미하고, 유언(testament)은 유언자의 일방적 선언에 의한 법적 처분권을 의미한다. 이 세 단어의 개념과 용례가 비블로스에서 차지하는 비중만큼이나 이 세 단어를 구분하여 번역함은 필수적이다. 당연히 promise는 ‘약속’ 혹은 ‘언약’으로, covenant는 ‘계약’으로, testament는 ‘유언’으로 번역됨이 합당하다 하겠다.
권위역에서 14 번 사용된 testament 중 7 번은 주의 저녁식사(만찬)와 관련된 주의 죽으심과 관련되어 사용되었고, 나머지 7 번은 OT와 NT의 비블로스와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음을 본다. 문제는 이 14 번의 testament란 단어가 권위역 제임스 왕 비블로스를 제외한 다른 여타의 비블로스들에서는 대부분 ‘covenant’로 번역되었다는 데 있다.
covenant로 번역해야 한다는 계약론자들은, 그리스어 ‘디아쎄케’를 일관되게 번역해야 할 필요성이 있고 또 히브리인의 계약(covenant)에는 피 흘려 죽이는 희생이 동반되므로 14번의 경우 모두 covenant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히 9:16,17의 경우조차 covenant로 설명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비블로스 전체에 수없이 계시된 ‘계약관계’와 ‘계약의 효력’을 간단히 ‘유언의 상속관계와 효력’으로 대체할 수는 없다고 역설하면서, 비블로스에 testament가 사용되게 된 것도 라틴어 역본들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절대성이 없다고 말한다.
반면에 testament로 번역해야 한다는 유언론자들은, 권위역이 covenant란 단어를 겐 6:18부터 히 13:20까지 총 295회나 사용하고 있고 단지 NT에서 14회만 testament로 번역해 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스어 ‘디아쎄케’의 의미에는 covenant도 있지만, 일차적 의미는 오히려 testament이며, 이는 전후문맥과 비블로스저자의 의도에 따라 구분해서 번역할 수 있다. 14 번의 경우는 전후문맥과 본문의 의미로 볼 때에 testament로 번역함이 정확하며 나머지 295회는 covenant가 정확한 것이다. 특히 이 14 번의 경우는 히브리인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왕가(교회)시대의 계시에 따른 것이며, 쌍방적 계약의 성격이라기보다는 죄의 사면과 엘로힘*의 왕국의 상속을 위한 일방적 은혜의 성격임을 역설한다.
권위역 제임스 왕 비블로스의 testament 입장은 은혜의 희소식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계약(covenant) 관계에서는 어느 한쪽이 계약을 위반하면 계약이 무효가 된다. 엘로힘*과 이스라엘의 계약관계에서도 이스라엘이 넘어짐으로 효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낡은 계약이 되고 말았다. 왕가(교회) 시대에 새 계약(new covenant)이 체결되었으나, 왕가(교회) 역시 연약한 육을 가진 사람들인 고로 넘어지고 계약을 위반할 수 있다. 그런데 엘로힘*의 은총으로 이 계약이 유언으로 바뀌게 된 것은 놀라운 은혜의 개입이며, 낡은 것을 새롭게 한 진정한 의미의 “개혁”(reformation)인 것이다(히 9:10). 유언은 유언자가 일방적으로 선언함으로 법적 상속권이 부여되므로, 우리의 어떠함과는 상관없이 효력을 발생하며, 이는 은혜 시대의 특징적 증거이기도 하다.
요컨대, covenant(계약)는 쌍방에 의해 확정되고, 맹세로써 성립되며(여기에 희생의 증거가 따른다), 쌍방이 지킬 때 효력을 발생하되 만일 한쪽이라도 어기면 무효화되고 저주를 받게 되는 것인 반면, testament(유언)는 유언자의 일방적 선언에 의해 확정되고, 유언자의 죽음으로써 성립되며, 지키는 행위와 무관하게 유언에 의해 자동적으로 효력이 발생하여 상속권이 부여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권위역은 covenant의 계시를 그대로 살리고 있으면서도(295회나 언급하고 있음), 단 14회에 한해서 testament를 계시한 유일무이한 비블로스이다. testament란 단어가 라틴어 역본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본다. 이방인의 첫 왕가(교회)인 안티오키아(안디옥) 왕가(교회)가 구라틴어 역본을 번역함으로써 라틴어 역본들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안티오키아(안디옥) 왕가(교회)가 그리스어 ‘디아쎄케’를 NT의 14 번의 경우 testament로 이해한 첫 왕가(교회)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testament가 크리스토스의 죽음을 보여주는 주의 만찬과 관련되어 사용되고, 엘로힘*의 증거의 말씀인 비블로스와 관련되어 사용되었다는 사실도 시사하는바가 있다. 결국 주의 만찬의 대신상환의 증거와 권능의 말씀인 비블로스의 증거로서의 testament가 오는 왕국을 상속받게 하는 효력과 직결되는 것이다. 아무튼 권위역 제임스 왕 비블로스는 계약관계를 기초로 하여 ‘유언의 은혜관계’를 계시하고, 계약의 상자(the ark of covenant, 언약궤)를 종국적으로 유언의 상자(the ark of testament)로 계시한(히 9:4; 계 11:19) 단 하나의 비블로스임에는 틀림이 없다.
오늘날 비블로스는 옛유언(the Old Testament, 구약)과 새유언(the New Teatament, 신약)으로 일컬어진다. 비블로스의 이 같은 타이틀은 오로지 권위역 제임스 왕 비블로스의 본문에 근거한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현대역본들의 경우 타이틀은 여전히 OT와 NT로 붙이고 있으면서도, 정작 비블로스본문에서는 Testament의 근거가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단어비교]
testament, covenant, will, promise
[활용]
tithes, tithing
[의미]
십일세(十一稅)(렙 27:31,32; 히 7:4-9; 열째를 바치는 세금 개념임)
vi, vt.: 십일세를 바치다(다 14:22)
[어원]
< OE teotha, tenth
[사용횟수]
겐 14:20부터 히 7:9까지 32구절, 40회 사용됨.
[단어해설]
tithe란 단어는 기본적으로 십분의 일을 뜻하는 단어들 중의 하나이지만, 비블로스의 용례에서는 조세(租稅)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렙 27:31,32에서는 tithe가 *주*께 거룩히 떼어놓은 the tenth(열째)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즉 *주*께 바쳐진 거룩한 세금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글로는 '십일세'(十一稅)로 번역하여야 정확하다. 조(租)는 강제성을 강조한 반면, 세(稅)는 자발성을 강조한 단어이므로 비블로스 용례에서는 '세'로 번역하여 십일세로 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세(稅)가 벼화(禾)자에 기뻐할 열 혹은 빼낼 열이 더해진 단어라서 기쁘게 빼내어 바치는 자발적 세금 개념을 나타내고 있고, 이것이 모세스* 이전의 아브람* 때부터 자발적 세금 개념으로 사용된 비블로스 용례와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단지 열째 항목을 지칭하는 '조'(條)를 붙여 십일조(十一條)로 하는 것은 비블로스의 tithe 용례와는 맞지 않으며, 오히려 tenth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경우는 그냥 쉬운 단어로 '열째'라 하면 족하다.
‘십일세(tithe<s>)’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ma‘ asar(aser)는 ’열 번째‘ 혹은 ’10분의 일‘을 뜻하며, 그리스어 dekate 혹은 dekatos도 ’열 번째 부분‘을 뜻한다.
비블로스에 처음으로 언급된 겐 14:20의 십일세(tithes)는 아브람*이 샬렘 왕 멜키쩨덱*에게 바친 것으로서, 여기서는 모든 것들의(of all) ‘십일세들’(tithes)이라 했고, 이 사건을 재해석한 히 7:4-9에서는 전쟁에서 노획한 것들(spoils) 중 ‘열째’(the tenth)라 했는데, 렙 27:31,32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십일세의 정확한 개념을 확인시켜 준다.
모세스* 이전의 아브람*이 자발적으로 바친 열째이기에 정확히 '십일세'인 셈이다.
비블로스에서 두 번째로 언급된 야코브*의 십일세 서약 역시, 법 시대 이전의 자발적인 서약(voluntary vow)이었다는 점에서 아브람*의 십일세와 맥락을 같이한다(겐 28:22).
야코브*가 자발적인 맹세로써 한 이 서약이 훗날 모세스*의 법에 재현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법 시대 이전이나 이후나 십일세의 본질과 취지는 동일하며, 애당초 자발적인 성격이었다는 사실이다.
법으로서의 십일세는 모세스*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모세스*의 법에서 십일세에 대한 자세한 조항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되었는데(렙 27:30-32; 숫 18:21-32; 다 12:5-7,11-12,17-18; 26:12-15), 이것이 말라키 3장에서 재확인되고 있다. 말라키의 십일세는 어디까지나 엘로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covenant)을 재확인한 성격이었다.
새유언(신약)에서 십일세에 대한 언급은 모두 8번 나오는데(맛 23:23; 뤀 11:42; 18:12; 히 7:5-9), 내용은 모두 옛유언의 용례에 해당되며, 당시 유다인들 곧 이스라엘이 실천해야 할 법을 재확인한 것이 전부였다.
비블로스의 새유언(신약) 어디에도 크리스천들에게 십일세를 명하거나 가르친 내용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왕가들(교회들) 가운데서 십일세를 가르치거나 실행했다는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새유언 시대에 왕가(교회)와 크리스천들에게 주어진 모든 말씀은 법과는 대조가 되는 은혜의 말씀들로 특징 지워지며, 자발적인 헌신을 바탕으로 하여, 억지나 인색함이 아닌 즐거움으로 피차 물질을 나누고 공유하는 코이노니아 즉 사랑의 교제를 가르치고 있다(활 2장; 4장; 롬 14:12; 코첫 9:3-14; 16:1-3; 코둘 8-9장 등등).
그리고 새유언의 왕가(교회)가 실천하는 물질의 나눔과 교제가 옛유언의 희생과 헌물이 예표하는 것을 성취한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필 4:19).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약으로 주어진 법으로서의 십일세 제도는,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의 조세법 성격으로서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유효하다. 반면에, 이방 국가들의 경우는 양심법에서 비롯된 나름의 국가법과 조세법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십일세를 바쳐야 하듯이, 이방국가에 속한 이방인 왕가(교회)들도 자기 국가의 조세법에 따라 세금을 바쳐야 마땅하다(롬 13: 1-7).
이스라엘인들이 이방 국가의 조세법을 지킬 이유가 없듯이, 이방인 왕가(교회)들이 이스라엘의 십일세를 지켜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새유언 시대에 왕가(교회)들은 마땅히 새유언의 가르침에 따라 은혜로운 물질의 교제와, 평균케 하는 나눔의 원리와, 새유언의 청지기 직분으로써, 크리스토스의 사랑의 법을 실천해야 할 것이며, 실제로 새유언 비블로스가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새유언 어디에도 이방인 왕가들이 십일세를 실천했다는 기록이 전무한 이유를 잘 말해 주고 있다.
[단어비교]
tithe, tenth
[활용]
worshipped, worshipper, worshippers, worshippeth, worshipping
[의미]
경배하다
have worship: 존경을 받다(뤀 14:10): 비블로스에 유일한 표현.
worshipper(s): 경배자(들)
[어원]
<OE weorthscipe < weorth worth + scipe -ship
[사용횟수]
겐 22:5부터 계 22:9까지 188구절, 198회 사용됨.
[단어해설]
그리스어 프로스쿠네오, 세보마이, 세바조마이, 라트류오, 유세베오/ 명사형으론 세바스마, 에쎌로쓰레스케이아, 쓰레스케이아.
영어 worship은 가치(worth)에 합당한 태도(ship)란 의미로서, 창조주께 합당한 가치를 돌려드린다는 뜻이다.
예배란 번역은 잘못된 번역이다. 지나치게 종교적 예식을 강조한 의미로서 엎드리는 종교적 의식을 뜻하는데, 비블로스의 의미와 용례에 전혀 맞지 않는다.
비블로스의 worship은 종교의식이나 예식의 개념이 결코 아니며, 매우 실제적인 개념의 단어이다. 창조주의 어떠하심 앞에서 두려워하여 엎드리는 자연스런 행위가 worship의 바른 의미이다. 그리스어 프로스쿠네오도 실제로 엎드리는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그분을 두려워하여 실제로 엎드리는 행위를 의미하며, 혹은 그러한 마음의 태도를 가리킨다.
흔히들 service를 예배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는 예배나 경배란 뜻이 아니고 섬김, 혹은 봉사란 뜻이다. 그리스어 라툴기아도 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worship과 service를 혼동하면 안 된다. 전자는 실제로 엎드리거나 마음의 태도를 의미하므로 경배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고, 후자는 레비 성직자들이 성전에서 봉사하듯이 봉사하는 일 혹은 행위를 가리키므로 봉사 혹은 섬김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다.
오늘날 기독교의 예배, 혹은 예배의식은 비블로스의 의미와 용례에서 보면 분명한 오류이며 종교적 시행착오라 아니할 수 없다.
[단어비교]
worship, service